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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죽음정치… "무반응이야말로 자살의 근본적 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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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죽음정치… "무반응이야말로 자살의 근본적 원인"

입력
2021.12.30 17:05
수정
2021.12.30 17:31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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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이래 이어진 본격적 죽음의 행렬은 한국 노동운동 특유의 윤리·행위양식·의례를 구성하게끔 했으며 ‘열사 정치’라는 한국 사회운동 특유의 ‘죽음의 정치학’의 중요한 부분을 구성했다. 열사의 죽음은 높은 수준의 계급적 각성의 결과이자, 다른 노동자 계급 동료와 시민을 각성케 하는 추동력이기도 했던 것이다.

천정환 성균관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천 교수는 이달 내놓은 저서 ‘숭배 애도 적대’에서 한국사회를 사로잡은 ‘죽음의 정치’를 분석한다. 집회들에서 호명되는 수많은 ‘열사’들을 소환해 한국사회가 이들의 자살을 어떤 방식으로 기억하는지 추적한다. 그럼으로써 자살이 한국사회를 어떤 방식으로 바꿔왔는지, 그 결과가 무엇인지 이야기한다.

민주화운동이나 노동운동 과정 등에서 숨진 사람들에게 한국사회는 열사라는 호칭을 붙인다. 권력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거나 질병으로 숨진 사람도 포함된다. 그러나 저자는 특히 스스로 목숨을 끊어 항거하고 저항한 사람이 열사로 불린다고 설명한다. 자연사가 아닌 죽음이 열사의 뜻에 진정성을 부여한다고 인식되는 것이다. 남겨진 사람들은 도덕적으로 고양되고 열사를 대신해 꿈을 이뤄야 한다. 저자는 “열사의 죽음이라는 비극은 (중략) 아예 도덕적인 퇴로를 차단하는 공포와 숭고의 기획”이었다고 설명한다.

전태일 열사 51주기였던 지난달 13일 오전 서울 동대문 평화시장 앞 청계천 버들다리 전태일 열사 동상 앞에 국화가 놓여져 있다. 천 교수는 저서에서 "열사의 정치학의 기원에는 1970년에 분신한 전태일과 그의 표상이 한국 사회운동 전체의 상징이 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이 있다"라고 분석한다. 뉴시스

전태일 열사 51주기였던 지난달 13일 오전 서울 동대문 평화시장 앞 청계천 버들다리 전태일 열사 동상 앞에 국화가 놓여져 있다. 천 교수는 저서에서 "열사의 정치학의 기원에는 1970년에 분신한 전태일과 그의 표상이 한국 사회운동 전체의 상징이 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이 있다"라고 분석한다. 뉴시스

국가의 폭력에 맞서는 약자들에게 열사의 죽음은 "최후의 도덕적 무기"였다. 1991년의 ‘분신 정국’에서 그랬다. 노동자들도 상황은 비슷했다. 저자에 따르면 1986년 이후로 속출한 ‘노동열사’들은 노태우·김영삼 정권 시기에 더 늘어났고 2005년까지 대학생(21명)보다 두 배가 더 많은 노동자(45명)가 분신자살했다.

이러한 자살이 학자들이 ‘정동(情動)’이라고 말하는 집합적 감정의 에너지를 만들어낸다면서 저자는 "한국 사람들은 그러한 죽음들이 초래한 어둡고 비통한 마음을 에너지로 삼아 전후좌우로 비틀대며 나아간다"고 말한다. 예컨대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사후에 극적으로 반전됐고 민주당의 지지율을 끌어올렸다.

분석은 열사들에서 시작해 5월 광주, 정치인들과 연예인들을 거쳐서 공적 영역이 주목하지 않는 무명의 자살자들로 나아간다. 그리고 자살들 뒤에는 사회적 원인이 있었다는 점을 거듭 강조한다. 저자는 자살의 원인이나 이유를 한두 가지로 환원하여 규정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인정하면서 “다만 알려진 정황과 유서에 쓰인 언어에 대해 논하고 분석하는 정도의 방법을 통해, 떠난 사람의 심정과 정황을 객관화하고 맥락화할 수 있을 뿐”이라고 강조한다.

숭배 애도 적대. 천정환 지음ㆍ서해문집 발행ㆍ400쪽ㆍ1만7,000원

숭배 애도 적대. 천정환 지음ㆍ서해문집 발행ㆍ400쪽ㆍ1만7,000원

자살을 통해서 주장을 펼치거나 고통을 호소하는 행위를 방조하거나 부추겨서는 안 된다. 그러나 죽음을 목격하고 가만히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그랬다면 청소년 연예인의 자유선택권과 학습권, 인격권, 수면권을 보장하는 ‘청소년 대중문화예술인 표준 부속합의서’는 제정되지 않았을 것이다. 가혹한 노동환경을 바꾸자는 목소리도 힘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는 자살 사건이 발생하기 전에 사회의 고통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저자는 서울시청 앞에 분향소가 설치되고 나서야 쌍용차 노동자들의 죽음이 관심을 받았다면서 “‘무반응’이야말로 기실 그 잇따른 죽음의 가장 유력한 사회적 원인일 것이며,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죽음문화의 가장 분명한 형식임에 틀림없다”고 못 박는다.

저자는 ‘과학적인 것, 불변하는 것’이라고 여겨지는 정신질환의 개념마저도 시대에 따라서 변화해왔음을 지적하면서 죽음의 정치를 지속시키는 사회의 책임을 거듭 강조한다. “현실에서 자살 문제에 관한 가장 큰 이데올로기적 장애는 ‘자기 책임주의’다. (중략) 그러나 스스로의 선택이라는 측면은 자살이라는 복잡한 현상의 한 측면에 불과하다. 자살이 개인의 선택이라는 생각은 한 사람에게 작용하는 사회적 관계와 그 압력과 고통을 무시한다.”

※ 우울감 등 말하기 어려운 고민으로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하면 자살예방 핫라인 1577-0199, 자살예방 상담전화 1393, 희망의 전화 129, 생명의 전화 1588-9191, 청소년 전화 1388 등에서 24시간 상담을 받을 수 있습니다. 기사에 소개된 책은 자살 사례들을 분석하면서 유서들도 함께 싣고 있습니다. 읽을 때 주의가 필요합니다.






김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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