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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하게 말하면 듣나요?" 그가 13년째 아스팔트를 구르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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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하게 말하면 듣나요?" 그가 13년째 아스팔트를 구르는 이유

입력
2021.12.21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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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숙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상임 공동대표 >
"착한 장애인 돼라" 강요당했지만
부조리한 사회 제도·구조 깨달아
"장애인 이동권은 공생의 최소 조건
변화 위해 죽을 때까지 운동할 것"

지난달 12일, 이형숙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상임 공동대표가 여의도 환승센터에서 160번 버스 아래 엎드려 있다. 장수현 기자

지난달 12일, 이형숙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상임 공동대표가 여의도 환승센터에서 160번 버스 아래 엎드려 있다. 장수현 기자


착하게만 있으면 해결되는 게 없어요. 이렇게라도 차별을 뿌리 뽑고 싶어요.

이형숙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상임 공동대표

휠체어가 없으면 어디도 갈 수 없는 이형숙(54)씨. 버스나 택시, 지하철을 타는 일이라면 몰라도, 그런 탈것들을 옴쭉달싹 못 하게 하는 데는 누구의 도움도 필요치 않은 전문가다. 그 '특기' 덕분에 정부에 내야 하는 돈만 4,440만 원이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상임 공동대표를 맡은 이후 교통방해죄 등으로 동료 활동가들과 함께 부과받은 벌금 총액이 그렇다.

지난달 12일 이씨를 인터뷰하기 위해 서울 여의도를 찾았을 때도 그는 버스 아래에 엎드려 있었다. 휠체어로도 승하차가 가능한 저상버스 도입 확대를 촉구하기 위한 시위였다. 이씨는 이날 영하 3도의 추위에도 얇은 면티 차림으로 도로에 얼굴을 대고 한 시간을 버텼다. 그가 연신 "함께합시다!"를 외치는 동안 시민들은 점퍼와 코트 깃을 여미면서 빠른 걸음으로 이씨 곁을 스쳐갔다.

'장애인 이동권 보장하라' 거리의 외침

이씨가 거리에서 '장애인 권리 보장'을 외친 지 올해로 13년째. 출퇴근 인파가 대중교통으로 몰리는 시간, 휠체어를 탄 채 보행 신호를 무시하고 횡단보도를 오가거나 지하철 승강장에서 열차를 오르내리는 일은 이씨가 주기적으로 감행하는 시위 방식이다. 이럴 때마다 적잖은 시민들에게 이씨는 불편하기 그지없는 존재이자 신경질적인 핀잔의 대상이다. "어렸을 때 저는 사람들을 귀찮게 하지 않는 착한 장애인이었다"고, 이씨는 인터뷰의 첫말을 뗐다.

"모르는 사람들에게 부탁하는 건, 귀찮게 하는 거다. 가만히 있어라"

세 살 되는 해 앓은 소아마비로 장애를 얻게 된 이씨는 '가만히 있으라'는 얘기를 숱하게 들으며 컸다. 여덟 살, 어렵사리 학교를 다닐 수 있게 되고부턴 공부보단 소변을 참는 게 일이었다. 재래식 화장실밖에 없는 학교에서 주변에 부탁하지 않고 스스로 볼일을 보는 건 불가능했다. 수업이 끝날 때까지 길게는 9시간 가까이 소변을 참으면서 스스로를 대견해하던 때도 있었다.

고사리손으로 허벅지를 꼬집어가며 그렇게 견뎌온 시간이었건만, 수학여행을 앞두고 '네가 끼면 불편하니 빠져라'던 선생님의 한마디에 무너지고 말았다. 학교에 가기 싫어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빠지다 보니 고등학교 땐 1주일에 한 번씩만 등교를 하게 됐다.

가만히 있는 게, 참는 게 능사가 아니라는 깨달음은 마흔을 넘기고서야 찾아왔다. 2008년 장애인자립생활센터 활동을 하면서다. "센터에서 활동하면서 내가 어릴 때 받은 억압과 상처의 원인이 뭐였는지, 어떤 개선이 필요한지 알겠더라고요." 그날 이후 이씨는 여름에는 더 뜨겁고 겨울에는 더 차가운 아스팔트 바닥을 떠나지 않았다. 화장실이든 어디든 내가 원할 때 갈 수 있도록 하겠다는 그 목표 하나만 생각했다.

20년째 지켜지지 않는 약속

지난 12일 이형숙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상임 공동대표가 서울 중구 서울시의회 앞에서 열린 '장애인이동권 보장 및 서울시 장애인권리예산 쟁취 결의대회'에서 발언을 하고 있다. 뉴시스

지난 12일 이형숙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상임 공동대표가 서울 중구 서울시의회 앞에서 열린 '장애인이동권 보장 및 서울시 장애인권리예산 쟁취 결의대회'에서 발언을 하고 있다. 뉴시스

장애인 이동권 운동이 20년간 지속되면서 시민 반응이 갈수록 차가워지고 있는 게 이씨는 못내 아쉽다. 하지만 장애인의 삶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기에, 이씨는 비난받을 걸 알면서도 '출근길 시위'를 멈출 수가 없다고 말한다.

당장 교통약자 이동 편의 증진을 위해 요구했던 저상버스의 경우 서울시라면 올해 도입률 75%(5,345대)를 달성해야 하지만 실제로는 65.6%(4,307대)에 그치는 실정이다. 내년에 추가 도입하기로 한 시내 저상버스는 650대지만 예산은 467대분만 반영됐다. 그나마 서울시는 나은 편이다. 이씨는 "교통환경이 열악한 지방은 뙤약볕이 내리쬐는 한여름이나 한파가 몰아치는 한겨울이나, 스스로 휠체어를 밀고 가지 않으면 장애인은 집밖 어디도 갈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씨는 장애인 이동권 보장은 장애 여부와 무관하게 공존·공생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힘닿는 데까지 운동을 계속할 작정이다. "예전에 저희 마을에 혼자 사는 발달장애인이 있었는데 동네 사람들이 찾아가서 밥도 해주고, 물도 길어주고 어울려 살았거든요. 그땐 그게 이상하지 않았는데 언제부턴가 장애인들을 시설에 격리하다보니 그런 공생이 어색해진 거 같아요.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 아스팔트이고 철도 선로라면 이곳에서 죽을 때까지 버틸래요. 법이 만들어져 더 이상 나를 필요로 하지 않을 때까지요."

장수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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