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SJ "프랑스, 美 다문화주의 위협에 직면"
프랑스에서 ‘미국식 행동주의’에 대한 비판이 커지고 있다. 성(性) 중립적 언어 사용부터 인종주의와 성차별, 역사적 인물에 대한 비난에 이르기까지, 미국에서 유입된 각종 사회 담론들이 프랑스 고유의 전통 가치를 뒤흔들면서 정신적 유산까지 위협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현대 프랑스 사회 건설에 근간이 된 18세기 말 시민혁명의 ‘자유·평등·박애’ 이념을 훼손시킨다는 지적마저 잇따르면서 지성계는 물론, 정계에서도 비난의 목소리가 이어지는 분위기다.
佛 자유·평등·박애 가치 '흔들'
12일(현지시간) 미국 일간 월스트리트저널(WSJ)은 “프랑스 정치인들과 지식인들이 점점 커지는 미국식 다문화주의와 젠더 정치의 위협에 직면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신문에 따르면 최근 프랑스 정치권에서는 ‘워키즘(wokeims)’이라는 단어가 뜨거운 감자로 떠오르고 있다. ‘정치적으로 깨어 있다(woke)’는 단어에서 파생된 용어로, 서구 사회에서는 통상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PC)이나 인종차별, 사회적 불의를 인식하고 적극 나서고 있다는 뜻으로 인식된다. 그러나 프랑스 보수 진영에서는 인종과 사회적 소수자의 권리를 대변하는 진보 운동을 폄하하려는 의도로 사용되고 있다는 게 매체의 설명이다.
WSJ는 최근 수년 동안 이른바 미국식 행동주의가 현지를 강타하면서 프랑스 내에서 보편적 가치인 자유, 평등, 박애를 둘러싼 위기감이 높아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프랑스는 1789년 시민혁명을 통해 공화정을 수립하면서 △국가 공통의 문화 △기본권 △평등과 자유라는 핵심 가치에 기초한 국가 정체성을 내세워 왔다. 그러나 지난 몇 년간 미국식 인종 다양성과 문화 다원주의가 스며들면서 젠더와 인종 문제, 탈(脫)식민주의 담론 가치를 주장하는, 소수자 사회의 타자성에 천착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이 같은 이론들이 프랑스 전통적 가치나 정교분리(라이시테)를 흔들어 사회를 분열시킨다는 목소리가 잇따르기도 했다.
실제 ‘언어’는 변화를 직접적으로 보여 주는 대표적 사례다. 지난달 프랑스의 대표적 사전 중 하나인 ‘르 프티 로베르’는 남녀 대명사인 ‘il(그)’과 ‘elle(그녀)’를 융합한 대명사 ‘iel(그 사람)’을 새로 실었다. iel은 최근 젊은 층을 중심으로 사용 사례가 늘고 있는 3인칭 대명사다. 영어의 ‘it’ 또는 ‘they’에 해당하는 중성 대명사지만, 프랑스어에서는 그간 지칭하는 단어가 따로 없었다. 새로 생긴 단어는 곧 사회 문제로 떠올랐다. 프랑스의 자부심이자 문화 유산인 프랑스어가 외국 문화의 영향을 받아 오염되는 징후로 간주됐다는 뜻이다. 특히 남녀가 아닌 중성 인칭 대명사를 만드는 것은 미국식 이데올로기에 경도된 결과라는 주장마저 나왔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속한 정당인 ‘전진하는 공화국(LREM)’ 소속 프랑수아 졸리베논 하원의원은 프랑스 한림원(한국의 국립국어원 격인 기관)에 “(르 프티 로베르의) 독단적 행동은 우리 공용어의 권위와 영향력을 약화하는 명백한 이념적 침투”라며 “포괄적 용어를 우리 언어에 들여놓는 신호탄이 될 것”이라고 비판했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의 부인인 브리지트 마크롱도 “우리말에는 그 남자와 그 여자, 이렇게 두 종류의 대명사가 있다”며 “우리 언어는 두 대명사로도 충분하다”고 꼬집었다.
보수 진영 "반인종주의 광기로 변해"
인종 문제 역시 도마에 올랐다. 지난해 미국에서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의 사망으로 ‘흑인 목숨도 소중하다(BLM)’ 시위가 유럽으로 번지자, 프랑스에서도 그간 큰 사회문제로 비화하지 않았던 인종적 다양성 문제가 폭발적으로 터져 나왔다. 작년 6월에는 17세기 절대왕정 시기의 재상 장 밥티스트 콜베르(1619~1683)의 석상이 잇따라 훼손됐다. 콜베르는 프랑스의 나라 기틀을 세운 전설적 인물이다. 그러나 사망 2년 전 식민지 노예들의 삶과 죽음, 구매, 종교, 처우 등을 규율하는 법 기반을 닦은 사실 때문에 이제는 인종 차별 시위대의 표적이 됐다. 일부 진보 인사는 공공기관과 학교 등에서 그의 이름을 뺄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올해 초에는 파리 오페라 극장의 독일인 신임 예술 감독이 발레단의 인종 구성을 다양화하고 배우들의 흑인 분장을 금하겠다고 선언하는 일도 발생했다.
사실 흑인을 비롯한 소수 인종의 인권을 증진시키는 움직임이 이례적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를 바라보는 프랑스 보수 진영의 시각은 불편하기만 하다. 이미 프랑스 내에선 인종 차별에 대한 조사가 오래 전부터 이어져 왔다. 모든 시민들을 동등하게 대우하는 정책도 시행해 왔다. 그런데 이제 와서 또 다른 차별적 잣대를 들이대는 건 과도한 행위라는 얘기다. 중도 우파인 마크롱 대통령은 “우리가 무엇인지를 지우는 게 아니라 새로운 동상·거리 이름으로 우리 역사를 완성해야 하는 작업을 하는 게 우선”이라고 강조했다. 장 미셸 블랑케 프랑스 교육부 장관은 “무엇이 민주주의 공화국을 무너뜨리는지 주의 깊게 봐야 하다”며 워키즘을 내부 분열의 씨앗으로 꼽았다. “반(反)인종주의가 광기로 변했다”는 비난의 목소리도 잇따랐다.
반면 진보 진영은 이 같은 시각이 프랑스 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 ‘편견과의 싸움’에 악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한다. 국제사회의 차별 해소 움직임에 발맞추긴커녕, 갈등만 키우면서 신뢰를 떨어뜨리고 있다는 지적이다. 델핀 라비제 지자르 프랑스 트랜스젠더협회 회장은 “이 용어(워키즘)는 동등한 권리를 위해 싸우는 사람들을 낙인 찍기 위해 사용되는 용어일 뿐”이라며 “우리의 싸움은 깨어난 것(woke)이 아니라 휴머니즘(인본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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