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 조서도 피고인 동의해야 증거능력 인정
공범 문제, 부패·조직범죄 역량 약화 등 우려
검사들 '연내 처리' 분주…피의자는 시간끌기
대검 '조사자 증언' '영상녹화 본증화' 검토 중
내년 1월 1일 이후 기소되는 사건부터는 피고인이 동의하지 않으면 검찰 피의자신문조서를 법정에서 증거로 쓸 수 없게 된다. 국회가 개정 형사소송법 시행 20여 일을 앞둔 지난 9일 관련 부칙을 통과시키면서 최종 기준이 확정됐기 때문이다. 검찰 안팎에선 그러나 졸속 입법 여파로 법 시행 이후에도 한동안 혼란이 불가피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기존 형사소송법에선 검사가 작성한 피의자신문조서에 대해 피고인이 검찰에서 진술한 내용과 동일하게 기재됐다는 사실만 인정하면 증거로 쓸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개정법에 따르면 피고인이 검찰 진술 내용을 부인하면 증거로 사용할 수 없다. 자백을 받기 위한 무리한 수사를 막고 공판중심주의를 강화하기 위한 목적이지만, 법조계에선 보완책이 논의되지 않으면 부작용이 커질 수 있다고 보고 있다.
"같은 사건 공범, 다른 결과…물증 없는 부패사건 대응 약화"
검찰 내부에선 공범 관계의 피고인들의 경우 피의자신문조서 증거능력 인정 여부에 따라 법적 판단이 엇갈릴 수 있는 점을 우려하고 있다. A는 자백하고 B는 부인할 경우, B가 A의 피의자조서를 부인한다면 증거능력을 인정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공범 기소 시점이 달라 조서 증거능력이 인정되는 사건과 그렇지 않은 사건이 항소심에서 병합됐을 때 어떻게 판단할 것인지도 논란거리다.
수도권 검찰청의 한 부장검사는 "조사도 안 한 공범이 있는데, 이미 조사한 피의자를 분리해 먼저 기소해야 할지 고민"이라며 "조서의 증거능력에 따라 A는 유죄, B는 무죄가 되는 등 모순적인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고 말했다. 재판 결과를 예측하기 힘든 만큼 실제 사례를 축적해 대응할 수밖에 없다는 게 일선 검사들의 분위기다.
물증이 없어 주로 진술에 의존하는 대형 부패·조직범죄 사건들의 경우, 실체적 진실 규명이 어려워질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특별수사를 많이 해온 전직 검사장은 "금품을 계좌로 받는 등 명백한 물증을 남기는 사건이 얼마나 되겠나"라며 "은밀한 거래가 많아 당사자 진술이 꼭 필요한 사건들은 기소가 쉽지 않을 수 있다"고 우려했다.
범죄대응능력 후퇴를 걱정하는 목소리도 있다. 승재현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아동학대나 성폭력 사건의 경우 객관적 증거만으론 입증이 어려워 당사자 진술이 공백을 메워주는데, 법정에서 증거능력이 무력화되면 자칫 정의의 공백이 발생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재판이 장기화하고 무죄율이 높아져 억울한 피의자 대신 억울한 피해자가 생길 수 있다는 의견도 있다. 공판 경험이 풍부한 한 부장검사는 "내년부터는 피의자 신문을 사실상 법정에서 하는 셈이라 사건 파악이 쉽지 않을 수 있고 재판도 당연히 길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검찰은 수사 중인 사건들을 최대한 연내에 처분하려는 분위기다. 반대로 일부 피의자들은 개정법 시행을 염두에 두고 출석 요청에 불응하는 등 시간을 끌고 있다. 일선 검찰청의 한 검사는 "피의자신문조서를 받아뒀다고 해도 이달 내에 기소하지 않으면 휴지 조각이 되는 셈이라 되도록 연내에 마무리하려고 한다"며 "가뜩이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직접 조사가 쉽지 않은데, 일부러 지연 전략을 펴는 피의자들 때문에 골치가 아프다"고 전했다.
대검 '조사자증언 활성화, 영상녹화 본증화' 보완책 검토
대검찰청이 지난 8일 발족한 검찰정책자문위원회 첫 회의에서도 이와 관련한 향후 수사 대응 방향이 논의됐다. 보완책으로는 조사자 증언 제도 활성화와 영상녹화 본증화가 제시됐다.
조사자 증언은 피고인을 수사단계에서 이미 조사한 경찰이나 수사관이 법정에서 진술내용 등을 증언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로 형사소송법 316조 1항에 명시돼 있다. 그간 필요성이 크지 않아 거의 활용되지 않았지만, 대검은 조사자 증언 제도를 적극 활용할 수 있도록 일선 검찰청과 경찰 등에 배포할 매뉴얼을 준비하고 있다.
대검 관계자는 "수사단계에서 이뤄진 피의자 진술을 법원에 온전히 전달한다는 측면에선 사실상 유일한 방법"이라며 "조서에 기록된 진술을 보존하면, 향후 증언대에 선 조사자에게 기억을 환기시킬 수 있다"고 설명했다.
대검은 영상녹화의 증거능력을 인정받기 위한 입법 논의도 추진한다는 계획이다. 재판이 늘어질 것을 감안해 영상녹화 내용 중 일부 녹취록 등을 제출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대검 관계자는 "사실을 충실하게 재현해 재판부가 정확히 판단할 수 있는 방안"이라고 밝혔다.
한국형사소송법학회장인 정웅석 서경대 교수도 "형사소송법 개정이 급하게 추진된 측면이 있어 부작용에 대한 보완이 필요한 상황"이라며 "수사단계에서 영상녹화 기록을 남기고 양측이 이를 확인하면 증거로 사용하는 방안도 검토할 만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검찰의 영상녹화 증거능력 인정 시도는 여러 차례 불발된 바 있어 도입 가능성은 미지수다.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가 2007년 이를 조문에 포함하려고 했지만 "법정이 수사기관이 작성한 녹화물을 시청하는 장소로 전락해 공판중심주의가 형해화될 우려가 있다"는 법원과 학계 반대로 무산됐다. 지난해에도 대법원은 "영상녹화물의 증거능력을 인정하면 조서에 증거능력을 부여한 기존 법보다 오히려 퇴보하는 것"이라며 재차 반대 입장을 명확히했다.
대법원 관계자는 "실질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검찰에서 자백하다가 법정에서 부인하는 경우인데 그런 사례가 많지 않다"며 "재판부가 검찰 조서는 보충적으로 고려할 뿐이라 개정법 시행에 따른 변화가 크진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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