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롭힘으로 사망 인정하고도 산재 거절
'캐디는 근로자 아냐' 낡은 인식 탓
"계약 형식 말고 실질적 근로관계 봐야"
"'술은 마셨지만 음주운전은 아니다'랑 뭐가 다릅니까?"
골프장 캐디로 일하면서 직장 내 괴롭힘을 겪다 극단적 선택을 한 고(故) 배모(27)씨에 대한 근로복지공단의 '산재보험 적용 불가' 결정에 터져 나온 격한 반응이다. 심지어 공단은 배씨가 사망한 원인이 '업무상 질병이 맞다'고 인정한 바 있다. 일하다 산재를 당한 건 맞지만, 산재 보상은 안 된다는 모순에 노동계는 부글부글 끓고 있다.
시민단체, "이건 직무유기"… 본부에 재청구
12일 시민단체 직장갑질119에 따르면 고용노동부 근로복지공단고양지사는 유족급여와 장의비를 청구한 배씨 유족에게 지난 8일 '고인은 산재보험법의 적용을 받는 근로자로 보기 어렵다'며 부지급 결정문을 전달했다. 배씨 유족의 산업재해 신청을 정부가 거절한 것이다.
배씨는 2019년 7월부터 경기 파주시의 한 골프장에서 일하면서 '캡틴'이라 불리는 상사의 지속적인 괴롭힘에 시달려 왔다. 배씨는 모두가 들을 수 있는 무전으로 "뚱뚱하다고 못 뛰는 거 아니잖아" "니가 코스 다 말아먹었다"는 말들을 들어야 했고, 작년 9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에 대해 근로복지공단 경인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는 심사위원 7인 만장일치로 '직장 내 괴롭힘이 사망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이 높아 고인의 사망 원인은 업무상 질병으로 인정된다'는 판단을 내렸다.
업무상 질병은 인정되나, 정작 산재보험 지급은 안 된다는 뜻이다. 배씨를 비롯한 캐디들이 '산재보험 적용제외 신청서'를 썼다는 게 이유였다. 캐디를 비롯한 특수형태근로종사자(특고)의 불안정한 지위를 악용한 사업자들이 비용을 아끼려 적용제외 신청서를 사실상 강제로 받거나 대리 서명까지 하는 문제는 익히 알려져 있다. 실제 지난해 특고의 적용제외 신청비율은 83.2%에 달한다.
직장갑질119는 "직무유기 결정에 불복한다"며 "공단 본부를 상대로 심사 청구를 진행하겠다"고 밝혔다. 공익인권법재단 공감은 회사와 가해자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민사소송을 진행 중이다.
"법 완전 잘못 해석…실질적 고용관계를 봐야"
전문가들은 적용제외 신청서를 근로자 여부 판단 기준으로 잡은 것 자체가 문제라고 지적한다. 근로계약서나 산재보험 적용제외 신청서 같은 '계약의 형식'이 아니라 '계약의 실질'로 노동자(근로자) 여부를 판단하는 추세란 것이다. 회사로부터 실제 업무 지휘와 감독을 받는지 종합적으로 검토해야 한다는 대법원 판례(2006년 12월 7일)가 대표적이며, 2009년 수원지방법원과 2013년 서울고등법원에서도 "캐디를 근로자로 봐야 한다"는 판결이 나오기도 했다.
여전히 현장에서 노동자 여부를 소극적으로 판단하고 계약이란 표면적 형태에만 집착하는 사이 캐디뿐 아니라 학원강사, 네일아티스트 등 프리랜서들은 직장 내 괴롭힘과 부당해고, 월급 삭감 등을 감수하고 있다. 다퉈 보려 해도 산재보험, 실업급여 등 보호장치 사각지대에 있기 때문이다. 네일숍에서 하루 10시간씩 일하고 70만~80만 원의 월급을 받다 일방적으로 해고된 A씨는 "사장한테 최저임금이나 해고예고 수당 얘기를 꺼내 봤지만, 네일업계 관행이란 말만 돌아왔다"고 했다.
윤지영 직장갑질119 변호사는 "근로기준법상 근로자가 아니더라도 유사한 노무를 제공하면 당연히 재해로부터 보호받아야 한다"며 "배씨의 경우 근로자라는 증거는 차고 넘치는데 이런 근로관계의 실질을 따지지 않고 곧바로 산재 적용이 안 되는 특고라고 간주한 건 공단이 법을 완전히 잘못 적용한 것"이라고 꼬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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