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영 검사에 사과받은 10년 옥살이 피해자 최군
박준영 변호사가 동의 받아 한국일보에 입장 전해
김 검사 "미안합니다" 고개 숙이자 최군 "괜찮습니다"
위로하고 안아주며 용서와 화해의 시간 '새 인연'으로
가기 싫어도 가야만 하는 길이 있습니다. 피하고 싶어도 만나야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원통한 마음을 풀고,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는 해원(解冤)의 시간은 저절로 오지 않습니다. 가슴에 한을 맺히게 한 사람이 다가가야 합니다. 김훈영 부장검사가 길을 나선 이유일 겁니다. 지난 8월 14일 전주에서 김훈영 검사와 최군이 만났습니다. 최군은 2000년 발생한 익산오거리 '택시기사 살인사건'의 진범으로 몰려 10년간 옥살이를 했고, 김훈영 검사는 2006년 진범에게 무혐의 처분을 내림으로써 최군의 억울함을 풀어주지 못했습니다.
최군이 나오지 않을 수 있다는 걱정을 잠시 했습니다. 재심에서 무죄를 받은 지 5년이 지났지만 고통의 기억은 쉽게 지워지지 않습니다. 그는 재심 법정에서 변호인이 바로 옆에 앉아 있는데도 매번 식은땀을 흘렸습니다. 넓고 단단한 등이 금세 축축해졌습니다. 그는 피고인석에 앉아서 연신 손으로 얼굴의 땀을 닦았습니다. 그에게는 화해의 자리도 부담이 됐을 겁니다. 나와 준 것만으로도 고마웠습니다.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김훈영 검사가 먼저 말을 건넸습니다. “미안합니다. 진실을 밝혀 드리지 못했습니다. 저 때문에 오랜 시간 억울한 옥살이를 하게끔 해서 마음이 많이 아픕니다.” 최군이 들은 첫 사과였습니다. 최군의 억울한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가슴 아픈 수사를 했다고 고개를 숙였습니다. 최군은 그러나 울컥하며 눈물을 쏟아내지도 않았고, 서러운 나머지 김훈영 검사를 쏘아붙이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늘 담담했기 때문입니다.
재심 재판이 끝나갈 무렵이었습니다. 법정에서 최군에게 마지막으로 할 말을 생각해보라고 했더니 돌아온 말은 ‘별로 할 말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최군은 재심을 도와달라며 제게 먼저 찾아왔던 것도 아닙니다. 이런 냉소적인 태도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게 아닙니다. 열다섯 살 소년이 10년 동안 억울한 옥살이를 했습니다.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억울함, 쌓여가는 좌절감, 세상을 향한 분노까지, 냉소는 어쩌면 생존을 위한 선택이었을 겁니다.
8월 14일 용서와 화해를 화두로 한 두 사람의 첫 만남은 2시간 동안 이어졌습니다. 김훈영 검사의 사과를 최군은 그 자리에서 받아들였습니다. 다 잊었다며 괜찮다고 했습니다. 그가 늘 보였던 담담함 이상이었던 건 분명합니다. 그리고 김훈영 검사와 최군은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대화를 이어갔습니다. 김훈영 검사가 용기를 내서 다가가고 최군이 배려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제가 쓸 수 있는 어휘의 한계가 의미 있는 만남을 제대로 기록하지 못하는 아쉬움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김훈영 검사가 보인 용기 있는 행동의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기관이 아닌 검사 개인이 수사의 잘못을 인정하고 당사자에게 직접 사과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오류를 쉽게 인정하지 않는 검찰의 과거를 떠올려 본다면,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겁니다.
미국에서도 의미 있는 일이 있었습니다. 글렌 포드는 1983년 1급 살인죄로 사형 선고를 받았지만 30년이 지나 진범이 따로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포드를 기소했던 검사 마티 스트라우드는 지역신문에 잘못을 고백하고 반성하는 글을 게재했습니다.
“나는 오만했고, 심판하는 일을 좋아했고, 스스로에게 도취돼 있었고, 또 자신만만했다. 나는 정의 그 자체보다 내가 이기는 것에 더 몰두했다. 내가 촉발한 글렌 포드의 비참한 상황에 대해 그와 그의 가족에게 사죄한다. 검사의 의무를 다하지 못해 오점을 남기게 된 재판부에도 사과한다.”
검사는 폐암으로 죽음을 앞둔 포드를 찾아가 사과했습니다. 비록 용서받지는 못했지만 진심으로 반성하고 사죄한 스트라우드 검사의 행동은 큰 울림으로 다가왔습니다. 그의 용기 있는 행동이 오히려 사법 신뢰를 끌어올리는 계기가 됐습니다.
김훈영 검사도 그날 전주에서 최군을 만나고 나서 생각이 더 깊어진 것 같습니다. 그 고뇌가 한국일보 인터뷰로 이어졌다고 봅니다. 김훈영 검사가 최군을 위로하고 배려하는 과정 그리고 앞으로 계속될 두 사람의 인연을 응원해 주십시오. 저는 김훈영 검사와 최군이 의미 있는 선례를 만들었다고 믿습니다. 도와야 할 이유가 충분하기에 저도 곁에서 돕겠습니다.
김훈영 검사의 진정성은 여러 번 확인했습니다. 10월 16일 저와 김훈영 검사는 저녁 식사를 했습니다. 그는 오랫동안 괴로워했던 것 같습니다. 15년 전 자신이 최군에 대해 내린 ‘잘못된 결정’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변명할 법도 했지만, 그저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했습니다. 그의 얼굴을 보면서 최군과의 화해의 자리가 오래전에 가능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김훈영 검사와 같은 상황에 놓였다면, 저는 진범을 상대로 어떤 판단을 했을까. 스스로에게 진지하게 물어봅니다. 저도 비슷한 잘못을 했을 겁니다. 지금까지 살면서 그런 운명적 상황에 놓이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사건을 공론화하면서 당시 김훈영 검사의 처지와 상황도 고려했어야 했는데, 저는 정의로운 일을 한다는 명분을 앞세워 김훈영 검사를 오랫동안 많이 비난했습니다. 언제부턴가 이런 비난을 좋아했고 스스로 도취됐습니다. 김훈영 검사와 그의 가족이 겪었을 고통을 생각해봅니다. 지난 일들을 반성합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가슴 아픈 일이 또 있습니다. 2016년 9월 28일 아침, 불길한 느낌이 드는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한 달 전 법정에 나와 증언했던 경찰관이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증언석에 앉아 떨리는 목소리로 중요한 사실을 인정했던 당시 익산경찰서 소속 막내 경찰이었습니다. 그도 저와 비슷한 또래의 자녀들이 있었습니다. 제가 싸잡아 경찰의 책임을 이야기하지 않고 지위와 역할을 구분해 막내 경찰로서 겪었을 상황을 고려했다면 어땠을까. 때늦은 후회입니다.
‘약촌오거리 택시기사’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름도 없이 우리에게 불리고 있는 피해자 유OO씨입니다. 이 비극적 사건이 사회적 약자의 억울함을 대변하고, 잘못을 인정하는 사회를 만들어가는 계기가 되고 있습니다.
사건 당시 유씨에게는 아내와 어린 두 자녀가 있었습니다. 새벽 1시께 심야 포장마차에서 자장면으로 허기를 달래고 다시 운전대를 잡았습니다. 택시 주행기록으로 확인되는 마지막 식사 시간은 ‘16분’에 불과했습니다. 손님 한 사람이라도 더 태우려 했던 피해자. IMF로 사업을 접고 택시 운전으로 빚을 갚아가며 생활하던 가장이었습니다. 유OO씨의 명복을 빕니다.
재심 법정에서 최군의 손을 여러 번 잡았습니다. 자꾸 닦아내지만 긴장한 최군의 손은 늘 끈적였습니다. 재판을 마치고 나서 악수를 나눈 제 손의 감촉도 그 끈적임만큼 오래갔습니다. 그런데 전주에서 김훈영 검사와 헤어지면서 잡은 최군의 손에서는 미끈거림이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그 자리가 최군에게 적지 않은 위로가 된 것 같습니다. 헤어지면서 두 사람이 서로 껴안았습니다. 뭉클함이 밀려왔습니다.
김훈영 검사의 용기가 왜곡 없이 평가받기를 원합니다. 약촌오거리 수사의 과오에 대한 평가를 넘어 ‘불의의 어둠을 걷어내는 용기 있는 검사, 힘없고 소외된 사람들을 돌보는 따뜻한 검사, 오로지 진실만을 따라가는 공평한 검사, 스스로에게 더 엄격한 바른 검사, 그리고 잘못을 인정할 줄 아는 검사’로 후대에 기억되길 바랍니다.
“당신의 용기 응원합니다. 용서합니다. 화해합시다.” 김훈영 검사에게 최군이 건네는 말입니다.
※ 이 글은 최군의 입장을 담아 작성했고, 최군의 동의를 받아 박준영 변호사가 한국일보에 보내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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