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에 소재한 고등학교에 강의가 있었다. 진료실에서 약자들을 만나고 글을 쓰게 되는 이야기였다. 학교는 지하철 4호선 역 근처였다. 숙대입구 역에서 30분 정도 여유 있게 도착하도록 오이도행 열차에 올랐다. 주행하던 열차는 한 정거장 만에 멈췄다. "혜화역과 서울역 사이에서 장애인 시위가 있어 운행이 늦어지고 있습니다. 정리되면 곧 출발할 예정입니다.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승객들은 방송을 듣고 기다렸지만 한참 동안 지하철은 움직이지 않았다. 슬슬 불안한 시간이었다. 주변에서 볼멘소리가 튀어나왔다. "장애인이 정상인의 통행이나 방해하고 참."
지하철은 한 정거장만 가고 다시 멈췄다. 재차 안내방송이 나왔다. 이제는 강의에 늦을 것이 확실했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한 승객이 장애인들이 불법으로 지하철을 가로막고 있다며 누군가와 통화하고 있었다. 나도 담당 선생님께 전화를 걸어 사정을 설명하고 양해를 구했다. 오이도행이었던 열차는 사당으로 종착역이 바뀌었다. 플랫폼에는 많은 사람들이 불만 섞인 표정으로 열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누군가 투덜거렸다. "장애인 때문에 이게 무슨 고생이람."
강의에는 30분 늦었다. 꼬박 한 시간 넘게 지하철이 멈춘 셈이었다. 100여 명의 학생들은 그 자리에서 그대로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학생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죄송합니다. 일찌감치 출발했지만 지하철이 한 시간 넘게 멈춰 있었습니다. 늦은 것은 제 책임이자 잘못입니다. 지금부터 책임지고 정해진 강의를 마치겠습니다." 문득 기다린 아이들이 무엇인가 배울 수 있는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평소와는 다르게 강의를 시작했다.
"여러분들은 30분을 그냥 강의실에서 앉아 있었습니다. 늦은 것은 제 책임이지만, 그 30분은 무의미하지만은 않았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늦은 것은 장애인 이동권 보장 시위 때문이었습니다. 장애인에게 이동할 권리가 있다는 사실은 너무 당연합니다. 그들이 버스나 지하철을 이용해서 이동할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도 상식적이지요. 하지만 그 상식은 오래도록 표류했습니다.
이전에 사용되던 것은 리프트였죠. 오랜 시간 동안 내려가면서 '즐거운 나의 집' 멜로디가 크게 울려 퍼지는 리프트를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굴욕적이고 위험한 장치였습니다. 바로 20년 전 4호선 오이도역에서 장애인이 리프트에서 굴러떨어져 숨졌습니다. 이동권을 보장하려면 엘리베이터가 필요했습니다. 기존 역의 설계를 바꿔야 했죠. 한 번에는 불가능한 일이라 점진적으로 교체하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예산은 자꾸만 삭감되었습니다. 장애인 이동권 보장은 급선무가 아니었죠. 장애인들은 목소리를 내러 사망 사건이 있던 4호선으로 나왔습니다. 승객들은 '불법 시위'라고 했지만 그들의 시위에 위법은 없습니다. 그냥 많은 장애인이 동시에 지하철을 타고 내릴 뿐입니다. 시간이 많이 걸리니 열차 운행이 지연되겠지요. 그러면 오늘처럼 많은 사람이 불편에 처한다는 사실을 그들도 모르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가시적으로 보여주어야만 이야기가 시작되는 지점이 있습니다. 바로 이 30분입니다. 이 시위가 없었다면 여러분이 이런 이야기를 듣는 일도 없었겠지요. 우리는 장애인 이동권이 보장되지 않아서 30분의 사회적 비용을 지불한 것입니다. 방금 30분은 그런 의미가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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