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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랜서에게 해촉증명서는 필수

입력
2021.12.11 00:00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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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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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병이 끝없는 변이로 모든 세계인들의 두뇌에 그리스 알파벳을 철저히 새기려 들고 있으나, 시간은 흐르고 사람들은 살아가고 일상은 진행된다. 연말을 맞아 길거리에 캐롤이 울려 퍼진다. 두루미들이 따뜻한 남쪽으로 날아온다. 사람들은 롱패딩을 입고 김밥으로 진화한다. 그리고 프리랜서들은 클라이언트들에게 분주히 메일을 보낸다. "해촉증명서 발급 부탁드려도 될까요?"

해촉증명서란 한 기관이나 회사가 발급인과의 근무, 재직, 금전 지불 관계가 종료되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서류다. 그러니까, 해당 기관과 더 이상 일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런데 프리랜서들이 왜 이 해촉증명서를 발급하고 다닐까? 건강보험공단에 제출해야 하기 때문이다. 왜 건강보험공단에 해촉증명서를 제출해야 할까? 해촉증명서를 제시하지 않으면, 건강보험공단은 일회성 소득을 지속성 소득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내가 한 게임 회사에서 1,000만 원을 받고 시나리오 기획 용역을 했다고 치자. 기획이 끝나면 나는 다시는 그 게임 회사에서 1,000만 원을 받을 일이 없는데, 건강보험공단에서는 그 소득이 지속된다고 간주하고 건강보험료를 올린다. 해촉증명서를 일일히 발급해서 내 소득이 내려갔음을 증명하지 않는다면, 몇 년 안에 건강보험공단은 나를 억대 소득을 올리는 위대한 프리랜서로 간주할 것이다. 결국 홈택스의 원천징수 명세서를 하나씩 뒤져 보며 일일이 메일을 보낼 수밖에 없다.

행정 업무와 그와 연결된 지난한 서류 작업은 본래 영혼의 강인함을 요구하지만, 해촉증명서 발급은 특히 고통스러운 일이다. 일한 지 1년이 넘은 사람에게 서류를 요구하는 것 자체가 좀 민망하지만, 이 정도는 고충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담당자가 왜 그런 일을 해야 하는지 이해를 못하기도 하고(내 상식으로도 쉽게 이해하기 힘들긴 하다), 아예 담당자가 퇴사해서 일이 공중에 붕 떠 버리기도 한다.

가장 고통스러운 상황은 좋지 않게 관계를 끝내게 된 사업장에서 해촉증명서를 떼야 하는 경우다. 담당자랑 드잡이를 했는데 1년 뒤에 저자세로 해촉증명서를 요구하기는 참으로 힘든 일이다. 그렇게 자기 존엄을 깎아 먹어서라도 서류를 떼 주면 다행이지 아예 무시해 버리면 딱히 뾰족한 수가 없다.

위에서도 말했듯이, 내 상식으로는 이 상황이 이해하기 힘들다. 나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원천징수의 얼음장 같은 손길을 피하지 못했다. 나라는 내 소득을 낱낱이 알고 있다. 그런데도 왜 이런 번잡한 행정을 거쳐야 하는 걸까? 정의당의 장혜영 의원은 이 문제를 지적하면서 이것이 발급을 요청해야 하는 프리랜서와 그 서류를 다 처리해야 하는 공단 직원들 모두에게 고통스러운 일이라고 했다.

오늘 나는 열 곳가량의 사업장에 해촉증명서를 요청했다. 담당자 퇴사로 일이 붕 떠 버린 곳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사업장에서는 친절한 답변과 서류가 돌아왔다. 덕분에 나는 이전에 함께했던 사람들과 짧게나마 안부를 나누고, 그들의 행복한 연말을 기원할 수 있었다.

잠깐, 어쩌면, 건강보험공단의 의도를 알 것 같기도 하다. 해촉증명서가 아니었으면 내가 어찌 순간의 인연들을 하나하나 기억하고 연락을 돌렸겠나. 만족스러운 인간관계를 누리는 사람이 더 건강하니, 이 모든 것은 프리랜서의 건강을 위한 큰 그림이었을지도 모른다.


심너울 SF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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