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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절한 예술가의 삶 아닌 냉철한 지성으로 성찰을 준 '할머니 시인'[다시 본다, 고전]

입력
2021.12.09 15:30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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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문학상 수상 시인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끝과 시작'

편집자주

어쩐지 펼쳐 보기 두려운 고전을 다시 조근조근 얘기해 봅니다. 다수의 철학서를 펴내기도 한 진은영 시인이 <한국일보>에 4주마다 금요일에 글을 씁니다.

폴란드 시인 비스와바 쉼보르스카가 1996년 12월 6일 스웨덴 스톡홀름 알란다공항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쉼보르스카는 2012년 2월 1일 별세했다. 스톡홀름=AP 연합뉴스 자료사진

폴란드 시인 비스와바 쉼보르스카가 1996년 12월 6일 스웨덴 스톡홀름 알란다공항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쉼보르스카는 2012년 2월 1일 별세했다. 스톡홀름=AP 연합뉴스 자료사진

통찰과 유머가 넘치는 이 폴란드 할머니 시인의 시집을 사랑하지 않기란 참 힘든 일이다. 나는 비스와바 쉼보르스카(1923~2012)를 '할머니 시인'이라고 부르는 걸 좋아한다. 1994년 그녀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면서 70대의 노시인으로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잘 알려진 여성 시인이 비극적 최후를 맞지 않고 장수하며 사랑과 영광을 누렸다는 사실을 늘 기억하고 싶기 때문이다. 여성 시인에게도 최악의 환경을 광기로 버티는 처절한 삶 말고 냉철함과 지성을 발휘하며 글을 쓰고 천수를 누리는 삶이 가능하다는 희망의 주문이랄까.

쉼보르스카는 노벨문학상 수상 직후의 인터뷰에서 작가로서의 특별한 야심 없이 "시 하나가 완성되면 다음번에는 어떤 시를 쓸까 그 생각에만 빠져" 지내는 평범한 인생을 살았다고 회고했다(시집 '충분하다' 옮긴이 해설). 물론 그녀의 인생에 어려움이 없었다고 할 수는 없다. 쉼보르스카는 열네 살 때 아버지를 잃었고 대학을 중퇴해야 했으며 결혼 생활도 그다지 원만치 않았다. 또한 정치‧문화적 격동기를 살았다. 그녀의 청춘은 끔찍한 전쟁과 함께 시작됐다. 폴란드의 남부도시 아우슈비츠에선 잔악한 유대인 학살이 자행되었고, 이념에 따라 작품들을 검열하는 분위기에서 그녀는 시인으로서 첫발을 내디뎠다. 그러나 정치적 이유로 아사 직전의 궁핍을 겪다 목을 맨 마리나 츠베타예바가 겪었던 시대적 곤경("나는 잃을 것이/없다. 끝에 끝!"·'끝의 시')과도, 가스 오븐에 머리를 넣고 자살을 감행한 실비아 플라스가 처했던 극도의 심리적 곤경("내 안엔 비명이 살고 있어요"·'느릅나무')과도 얼마간 거리를 유지할 수 있는 행운이 그녀에게는 있었다.

쉼보르스카는 이 행운을 한 방울도 낭비하지 않고 시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들을 했다. 인간 운명에 대한 실존적 성찰, 정신의 환기를 주는 아이러니, 너무 절박한 이들이 잃어버리기 쉬운 유머. 이것들을 가지고 그녀는 사랑과 역사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뜨리고, 다른 예술가들이 멈출 수 없는 비명을 통해 하려던 말을 더 많은 사람들이 잘 들을 수 있도록 했다.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릴 만큼이나 평이한 언어로 말이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누군가 내게 편지로 물었다./ 이것은 내가 다른 이들에게 묻고 싶었던/ 바로 그 질문이었다."('20세기의 마지막 문턱에서') 쉽고 명징하지만 마음을 울리는 시구다. 21세기를 시작하는 문턱에서 우리는 이메일이나 디엠(DM)으로 똑같은 질문을 하고, 100년이나 200년 뒤에는 어쩌면 목성에 있는 한 도시에서 역시 이 물음을 던지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시를 읽지 않았다면 우린 묻도록 허용된 숱한 실용적인 질문 대신 이런 막연한 질문이나 반복하고 있는 자신을 부끄러워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또다시, 늘 그래왔던 것처럼/ 앞에서 내내 말했듯이/ 이 순진하기 짝이 없는 질문보다/ 더 절박한 질문은 없다"로 끝나는 이 시의 마지막 연을 읽고 나면, 이 질문이 어리숙한 나만의 것이 아니라 모두의 것이라는 사실에 위로를 받게 된다. 스무 살의 한 친구로부터 이 질문을 받고 우물쭈물했던 사람이 나만은 아니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우리가 계속 이렇게 물을 수 있는 것은 "자두 속에 씨가 박혀 있듯 내 안에는 당연히 영혼이 깃들어"('풍경')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일상의 태만하고 물렁한 과육 속에 콕 박혀 있는 각자의 영혼을 깨운다면 새로운 일들이 일어날 거야. 너는 평범한 삶을 이루는 수많은 기적을 발견할 수 있어. "많은 기적들 중 하나: 공기처럼 가볍고 조그만 구름 하나가/ 저 무겁고 거대한 달을 가릴 수 있다는 사실"('기적을 파는 시장') 그 다음엔 모두 잠든 밤에도, 모두 쉬는 일요일에도 책임을 다하는 심장에게 감사할 수 있지. "내 심장아, 정말 고맙다/ 보채지도, 소란을 피우지도 않아서/ 타고난 성실성과 부지런함에 대해/ 그 어떤 보상도, 아첨도 요구하지 않아서."('일요일에 심장에게')

또 이 모든 기적과 감사에도 불구하고 너를 자주 엄습하는 우울에 대해서 조금 너그러워지게 될 거야. "심장에 박힌 감상적인 돌멩이 때문에/ 한 번, 또 한 번, 자꾸만 밑바닥으로 추락하지 않았더라면"('안경원숭이') 더 좋았을 테지만… 매번 그러고야 마는 존재, 바로 그게 너다. 심장에 박힌 건 돌멩이가 아니라 씨앗이었거든. 네 영혼의!

끝과 시작·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지음·최성은 옮김·문학과지성사 발행·508쪽·2만2,000원

끝과 시작·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지음·최성은 옮김·문학과지성사 발행·508쪽·2만2,000원


진은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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