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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을 보내며

입력
2021.11.30 12:21
수정
2021.11.30 13:57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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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은 1968년 6월15일 광화문 술집 ‘발렌타인’에서 신동문, 이병주 등과 술을 마시고 한밤에 귀가하다가 과속버스에 치여 이튿날 아침에 숨을 거두었다. 47세였다. 김수영은 생전보다 사후에 더 평가를 받아 한국 문단의 신화가 됐다. ‘김수영학(學)’이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그의 문학적 위치는 확고하다. 용인에 사는 그의 부인 김현경은 에세이집 ‘김수영의 연인’에서 그의 시 정신에 대해 “오직 존재의 참되고 아름다운 정신의 지표를 바랐다. 자학까지 하면서 그는 그 길을 가고 있었다. 그 길가에서 자라나던 무성한 풀잎들, 내 가슴속에는 언제나 그의 싱싱한 풀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고 썼다. 김수영의 생전 모습.

김수영은 1968년 6월15일 광화문 술집 ‘발렌타인’에서 신동문, 이병주 등과 술을 마시고 한밤에 귀가하다가 과속버스에 치여 이튿날 아침에 숨을 거두었다. 47세였다. 김수영은 생전보다 사후에 더 평가를 받아 한국 문단의 신화가 됐다. ‘김수영학(學)’이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그의 문학적 위치는 확고하다. 용인에 사는 그의 부인 김현경은 에세이집 ‘김수영의 연인’에서 그의 시 정신에 대해 “오직 존재의 참되고 아름다운 정신의 지표를 바랐다. 자학까지 하면서 그는 그 길을 가고 있었다. 그 길가에서 자라나던 무성한 풀잎들, 내 가슴속에는 언제나 그의 싱싱한 풀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고 썼다. 김수영의 생전 모습.

며칠 전인 11월 27일이 그의 탄생 백주년이었다. 많은 매체가 그를 소환해 융숭하게 대접하고 문학세계를 기렸다. 신문을 안 봤으면 모르고 지나칠 뻔했다. 나중에 알게 됐으면 왠지 내 삶의 무심함에 자책했을 거 같다.

그는 내 청춘에 박제된 시인이었으니까. 70년대의 문과대생에게 김수영(1921~1968)이라는 이름은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를 지닌 신비한 우상 같은 존재였다. 미팅에 나갈 때 무게 잡는답시고 옆구리에 끼고 다닌 그 시집을 기억한다. 민음사가 포켓판 크기 시리즈로 출간한 ‘오늘의 시인총서’ 첫 시선집 ‘거대한 뿌리’다. 아마도 내 인생에서 돈 주고 산 첫 번째 시집이 아니었나 싶다. 시집 표지에 실린 ‘아픈 몸이 아프지 않을 때까지 가자’라는 시구(시 ‘아픈 몸이’에서)를 아직도 잊지 않는다.

그 시절 내 청춘의 지적 허영이라 해도 좋고, 혹은 삶의 나침반처럼 삼은 짧고 강렬한 문장이 몇 개 있었다. 하숙집 책상 앞에 붙여놓았었다. 신동엽의 ‘껍데기는 가라’, 그리고 김수영의 시론 제목인 ‘시여, 침을 뱉어라’였다.

그의 얼굴이 그리워 인터넷을 뒤졌다. 전해지는 사진은 몇 가지밖에 되지 않는다. 하얀 러닝셔츠 차림에 오른손으로 턱을 괸 채 비스듬히 앉아 허공을 응시하는, 아마도 40대쯤으로 추정되는 흑백사진이 가장 많이 눈에 띈다.

유난히 짙은 눈썹 아래 형형하게 빛나는 맑은 눈동자, 야윈 뺨, 길게 뻗은 콧날, 꽉 다문 다부진 입술, 깊게 팬 미간 주름, 깎지 않은 수염. 많은 여성 문인을 울렸다는 백석만큼이나 미남이다. 알베르 카뮈나 제임스 딘의 이미지가 언뜻 스친다. 무릇 실존적, 반항적 지식인은 이렇게 생겨야 하는가 보다. 세 사람 다 우연히 교통사고로 한참 때 별이 됐으니 그런 사람들은 다 그렇게 홀연히 우리 곁을 떠나야 하는 숙명인가.

중년의 아재가 된 내가 오늘 김수영을 내 청춘의 서랍 속에서 꺼내 별 메시지 없는 글을 쓰고 있는 이유를 굳이 말하라면 딱히 할 말은 없다. 그냥 막연한 ‘첫사랑’ 같은 거다.

그가 마흔일곱 사후에 한국 문단에 신화처럼 우뚝 선 것은 그의 삶도 시도 여느 시인과 크게 달랐기 때문이다. 그는 서슴없이 치열했다. 그의 말대로 머리도 심장도 아닌 ‘온몸’으로 밀고 나갔다. 그는 허위를 배척했다. 정직하고 솔직한 육성으로 시를 썼다. 백 퍼센트 순도의 정직이 그의 시가 갖는 힘이다. 후대는 그를 참여시인이라고 부르지만 그는 좌우 어느 쪽도 아니었고 자기 실존과 자존과 생활에 충실한 인간이었다.

많은 기념행사 중 내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평생 김수영과 윤동주에게 미쳐 살았다는 서울시 환경미화원 김발렌티노씨가 인사동 화랑에서 개최한 ‘아 김수영’전이다. 그가 쓴 시화전 초대의 시 ‘두 형님’이 난 정말로 마음에 들었다.

“윤동주를 읽으면 더러운 피가 맑아지고/ 김수영을 읽으면 식은 피가 뜨거워져요/ 윤동주 형님은 물로 세례를 주시고/ 김수영 형님은 불로 세례를 주시죠/ 두 형님 고맙습니다/ 진실로 온몸으로 맑고 뜨겁게 살아가겠습니다/ 바람에 스치는 별처럼/ 바람에 일어나는 풀처럼요”(일부 생략).

한때 분명히 김수영이고 싶었던 시절이 있었다. 오늘, 우리나라 문학사상 가장 탁월한 문건이라고 일컬어지는 ‘시여, 침을 뱉어라’를 읽으며 이제는 그만 그를 떠나 보내련다.


한기봉 전 언론중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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