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도둑놈아!" 약값을 확인한 노인은 의사를 향해 고함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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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도둑놈아!" 약값을 확인한 노인은 의사를 향해 고함쳤다

입력
2021.12.07 17:00
수정
2021.12.09 1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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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박창범 내과 전문의

편집자주

의료계 종사자라면 평생 잊지 못할 환자에 대한 기억 하나쯤은 갖고 있을 것이다. 자신이 생명을 구한 환자일 수도 있고, 반대로 자신에게 각별한 의미를 일깨워준 환자일 수도 있다. 아픈 사람, 아픈 사연과 매일 마주하는 의료종사자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들어보자.

머리가 희끗희끗한 70대 정도로 보이는 노인 한 분이 말쑥한 정장차림으로 외래로 들어왔다. 10여 년 전 그 무렵, 나는 심장내과 전문의 수련을 막 마치고 서울에 있는 한 공공병원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어르신, 어디가 불편해서 오셨나요?"

“집 앞에 있는 약국에 갔다가 전자 혈압계로 혈압을 쟀는데 높게 나왔어요. 진짜로 혈압이 높은 건지 확인 한번 해 보려고 왔어요."

간단히 문진을 하고 혈압을 측정했더니 150/80mmHg이 나왔다.

“혈압이 정상보다 높네요. 약을 드시는 게 좋겠습니다."

나는 평소 많이 쓰는 약으로 3개월분을 처방했다. 노인은 고맙다고 하면서 외래를 떠났다. 그런데 20분쯤 지났을까. 밖에서 외래보조원이 누군가와 말다툼하는 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잠시 전 다녀간 노인이 상기된 얼굴로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이 도둑놈아!"

난 당황했다. 그러곤 화가 났다. 하지만 마음을 가라앉히고 대체 뭣 때문에 그러는지 이유를 물었다. 노인의 얘기는 이랬다. 본인의 아내도 고혈압으로 다른 의사에게 약을 받고 있다, 보통 3개월 처방을 받는데 약값은 5,000원 정도다, 그런데 왜 자기한테는 1만5,000원이나 되는 약을 처방했느냐, 그래서 화가 나서 이렇게 뛰어왔다는 것이었다.

난 노인의 부인이 무슨 약을 처방받았는지 확인했다. 예상대로 개발된 지 오래된, 저가약이었다.

“제가 어르신께 처방해 드린 약은 부인이 드시는 약 하고는 다른 것입니다. 최근에 개발된 약인데, 효과는 좋고 부작용이 적어서 처방해 드린 것입니다."

그래도 노인은 화를 거두지 않았다.

“싼 약도 잘 듣는데 왜 쓸데없이 비싼 약을 먹어야 합니까.”

더 이상 말해도 설득이 어렵겠다고 생각했다. 결국 부인이 복용하는 것과 비슷한 약으로 처방했고, 노인은 투덜투덜거리며 밖으로 나가셨다.

그로부터 3개월 후, 노인이 내원했다. 측정한 혈압은 130/70mmHg. 약으로 인한 부작용도 호소하지 않았다.

"약 드시고 혈압도 정상범위로 떨어졌고 염려했던 약물로 인한 부작용도 발생되지 않아 다행이네요.”

“그때는 화를 내서 미안해요, 하지만 내 말이 맞잖아요. 어쨌든 고마워요.”

시중에서 팔리는 고혈압약은 등록된 것만 해도 수백 가지다. 가격도 한 알에 몇십 원에서 1,000원이 넘는 것까지 다양하다. 약값은 언제 이 약이 개발되었는지, 약에 대한 특허권이 유지되고 있는지에 의해 결정된다. 예를 들어 싼 약은 개발된 지 오래돼 특허권이 만료된 경우다. 반면 비싼 약의 대부분은 최근 개발된 신약으로 특허권이 남아 있어 그만큼 가격이 높은 것이다.

의사들은 전문의가 되기 위해 대학병원에서 3~4년, 혹은 그 이상 혹독한 수련과정을 거치며 특정 상황에서 신속한 결정을 내리고 치료하는 방법에 대해 훈련받는다. 그러나 처방한 약물과 치료의 비용 대비 효과에 대한 교육은 받지 않는다. 수련과정이 운영되는 대학병원에서는 치료뿐 아니라 연구도 주된 목적 중 하나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신약에 더 관심이 높고 처방도 많은 편이다. 이에 비해 개발된 지 오래된 약들은 이미 많은 연구가 되어 있어 연구비를 받기도 어렵고 연구가치도 떨어지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관심이 덜하다. 따라서 대학병원에서 수련을 마친 신출 의사들은 환자들에게 필요한 약물을 선택할 때, 자신들이 경험하고 익숙한 신약을 우선적으로 사용할 가능성이 높다.

물론 여기에는 제약회사의 영민한 마케팅도 작용하고 있을 것이다. 개발된 지 오래된 저가의 약들은 홍보나 판촉을 거의 하지 않지만, 막 개발된 신약은 엄청난 돈을 들여가며 마케팅에 나선다.

의사들이 아무리 어렵고 힘들다고 해도 절대적 빈곤까지 가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러다 보니 환자의 형편에 대해선 별로 생각하지 않고, 그냥 자기 경제적 기준에 맞춰 약을 처방하기도 한다. 3개월 약값이 3만~4만 원이라면 의사 본인에겐 비싸지 않게 느껴지겠지만, 어떤 환자에겐 매우 부담스러운 금액일 수 있다.

어쨌든 그날 고혈압약 사건은 내게 큰 충격이었다. 그리고 이 충격은 의사가 환자들의 만성질환을 관리할 때 어떤 기준을 갖고 약물을 선택할 것인가에 대해 한번 더 고민하게 하는 계기가 됐다. 실제로 이전 임상연구들을 보면 오래전 개발돼 상대적으로 값이 매우 싼 약도 신약과 유사하거나 동등한 정도의 효과를 보이며, 부작용 발생률에서도 큰 차이가 나지 않았다. 이러한 결과를 고려한다면 특별한 문제가 없는 환자의 경우 초기에는 싸고 경제적인 약을 우선적으로 사용하고, 약물로 인하여 부작용을 겪거나 예상보다 효과가 적은 경우에 한해 새로 개발된 비싼 약을 처방해도 문제없을 것이다.

그 사건 이후 나는 보통의 고혈압 환자들에겐 가급적 경제적인 약을 우선 처방하려 하고 있다. 하지만 정신없이 환자를 접하다 보다 보면 종종 이런 원칙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나를 발견하곤 한다. 그럴 때마다 난 기억을 되살리려고 한다. 잔뜩 화 나 있던 노인의 그 목소리를 말이다.

강동경희대병원 심장혈관내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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