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청소노동자가 겪은 '참 희한한' 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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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청소노동자가 겪은 '참 희한한' 일들

입력
2021.11.29 04:30
수정
2021.11.29 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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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청소노동자 이씨(1962.7.10~2021.6.26)

일간지 기자로 13년, 해외봉사 NGO 활동가로 만 14년, 도서관 기간제 사서로 20개월을 일한 이씨가 서울대 기숙사 청소노동자로 약 20개월을 일하다 지난 6월 일터에서 별세했다. 만 29년을 동지로 함께 산 동갑내기 남편 이씨처럼, 그 역시 다리 한쪽은 늘 더 어려운 사람들을 위한 봉사의 자리에 걸쳐두고는 아이들이 다 독립하면 자신들의 노동을 반겨 맞이해줄 곳으로 다시 떠날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그의 생애 마지막 자리는 일터의 옹색한 미화원 쉼터였다. 2016년 경기 안성의 한 해외봉사 NGO 교육센터에서 양계 기술을 익히는 이씨. 남편 이홍구씨 제공

"한국에 대책 없이 똑떨어진 기분, 2017년 8월 여름은 그렇게 기억된다."

남을 돕고 살자는 남편 뜻을 좇아, 집까지 팔고 배 속 셋째까지 열 살도 안 된 세 아이와 함께 만 14년을 춥고 메마른 중앙아시아 신장위구르 오지로, 아프리카 세네갈로 선교 봉사활동을 다니던 이씨가 현지에서 어처구니없는 일을 겪고 빈손으로, 말 그대로 "대책 없이" 서울로 돌아온 직후였다.

만 55세 경력단절 여성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노동부 고용복지센터에 등록해 조리사 자격증 공부를 하면서 밑져야 본전이란 심정으로 낸 입사지원서로 기간제 도서관 사서가 된 게 그에겐 "기적 같은 일"이었다. 마포구 서강도서관. 공공도서관은 처음이라 설레기까지 했다. "사서 고생하는 직업"이란 말처럼 사서 일은 고되고 낯설었지만, 그는 그 일을 좋아했다.

사서 일에 한창 재미를 붙여가던 2019년 9월, 동갑내기 남편 이홍구씨가 아내 이씨에게 '서울대 시설관리직(미화원)'에 지원해보면 어떠냐'고 불쑥 제안했다. 기간제 사서는 만 60세까지밖에 못하지만 미화원은 '고령화 특화직종'이라 5년 더 일할 수 있고, 지원 요건인 '국민체력 100' 인증 심사에 통과하려면 하루라도 일찍 도전하는 게 좋지 않겠느냐, 나보다 건강해서 더 오래 살 텐데 늙어서 아이들에게 짐이 되면 안 되지 않겠느냐...는 말이었다. 아내가 조리사 자격증 공부를 하는 동안 보일러-냉동기 자격증을 따서 서울대 무기계약직(기계직)으로 취업한 남편은 아내와 한 직장에 근무하며 함께 출퇴근하는 즐거움도 기대했을 것이다. 봉사 NGO 활동으로 단련된 남편은 '미화 노동'에 아무 편견이 없었고, 해외 파견 사이사이 한국에 머무는 동안에도 우유 배달이며 택배, 퀵서비스 등 온갖 일을 거리낌없이 해온 터였다. 남편 이씨는, 아무 대꾸 없이 묵묵히 돌아앉던 그날 아내의 표정이 잊히지 않는다고 말했다. "상상도 안 해본 일이란 표정이었어요. 마치 내게 욕을 퍼붓는 것 같았어요."

다툼거리가 생겨도 가만히 듣고만 있다가 며칠 지나서야 조근조근 따져 남편을 무안하게 만들곤 하던 아내였다. 신혼 시절 직장 스트레스를 견디다 못 한 남편 이씨가 불쑥 집을 나가 며칠씩 객지를 쏘다니다 왔을 때에도, 아내는 마치 말썽 피운 아들을 대하듯 남편 손을 가만히 잡고는 '나랑 함께 교회 가자'고 말했다고 한다.

한 달 뒤, 아내는 도서관에 사직서를 냈다. 2019년 10월 근무 마지막 날, 아내는 일기 같은 에세이를 썼다. "(지난) 2년의 시간은 나를 위한 쉼의 시간이었다. (...서강도서관은) 나를 'start-up' 시켜준 곳이고, 나의 정체성을 다시 발견하도록 시간을 내어준 아름다운 공간으로 기억될 것이다." 그리고 한 달 뒤, 그는 서울대 기숙사(관악사) 무기계약직 청소노동자가 됐다.

청소노동자 이씨가 숨진 뒤 그가 일하던 기숙사에 학생들이 붙인 추모의 글들. 한국일보 사진

엘리베이터 없는 낡은 기숙사 4층 건물 한 동(정원 196명)의 현관과 계단, 복도, 공용 시설(화장실, 샤워실, 세탁실, 조리실) 청소가 그의 일이었다. 법정 최저임금에 주 6일 8시간 근무(주말 하루 4시간). 1시간 점심시간에, 50분 일하고 10분 휴식. 근무 규정은 그러했다.

학교 측은 '국민체력 100' 3급 인증을 받을 체력이면, 규정대로 쉬면서도 저 일을 일상적으로 해낼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규정을 어겨 일을 덜하는 경우도, 책 잡히지 않으려고 일을 더 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상황도 적잖은 변수였을 것이다. 이씨가 관악사 일을 시작한 직후 코로나 19 팬데믹이 시작됐다. 기숙사는 유례없이 북적거렸고, 배달 음식 쓰레기 등 일거리도 평소 같지 않았다. 미화원들은 중간관리자의 수시 점검을 받아야 했다.

힘들어도 좀체 내색하는 법이 없던 아내 이씨는 그 고되다는 해군 해난구조전대(SSU) 훈련을 받던 둘째 아들(1998~)에게 보낸 6월 23일 자 편지에 "엄마도 (...) 예전보다 많이 피곤한 것 같다"고, "점심시간에 좀 더 쉬려고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닌다"고 썼다. 그러곤 사흘 뒤인 6월 26일 토요일, 기숙사 미화원 쉼터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사인은 급성심근경색이었다. 향년 만 58세.

고인이 해군 해난구조전대 훈련소에 입소한 둘째 아들에게 보낸 6월 23일 자 편지. 그는 저 편지를 쓰고 사흘 뒤 숨졌다. 이홍구씨 제공

미화원 이씨는 사업가 아버지와 전업주부 어머니의 2남 2녀중 둘째(차녀)로 충남 공주에서 태어났다. 사업이 어려워지면서 그는 고교를 졸업하자마자 한 신문사 사무원으로 취업, 돈을 벌며 숭의여전 야간과정(도서관학)을 마친 뒤 85년 신문사 자료실 조사부 기자가 됐다. 크리스천이던 그는 공부하며 일하는 동안에도 서울 동숭동 '쉴터공동체'란 종교단체에서 고아와 노숙자, 알코올 중독자를 도왔다. 89년 거기서 남편 이씨를 만났다.

서울예전 사진과(81학번)를 졸업한 남편은 충무로 광고업계에서 도제식으로 월급 없이 노동하며, 아시안게임 등 이벤트가 있을 때면 신문사 일도 거들던 사진기자 지망생이었다. 서울대 법대(10회)를 중퇴하고 꽤 크게 사업을 하던 그의 아버지는 그런 아들을 못마땅해했고, 아들은 공부 잘해서 출세한 당신과 친척들을 더없는 자랑거리로 여기던 아버지와 불화했다. 반항심에, 희망 없는 미래에 비관하며 술에 절어 살던 어느 날 그는 우연찮게 동숭동 쉼터를 찾게 됐고, 거기서 아내 이씨를 만났다. 아내를 통해 신앙을 갖게 됐고, 보살핌받는 처지에서 보살피는 사람으로 점점 변해갔다. 둘은 91년 11월 결혼했다.

결혼을 하면서 남편 이씨는 아버지가 운영하던 중견기업 전기부품 OEM 납품회사(경기 부천)에 입사했다. 직원 50~60명쯤 되던 회사에서 그가 받은 직함은 품질관리과장. 그는 제 몫을 해내기 위해 인천 인하공전 야간과정(자동화기계)에 진학해 94년 졸업했다. 그해 첫 아들이, 98년 둘째가 태어났다. 97년 둘째를 임신한 아내는 신문사를 그만두었다. 그래도 될 만큼 생활은 웬만큼 안정적이었다. 다만 그는 아버지 기대만큼 직원들에게 모질지 못했고, 회사에 대한 불만을 사장 대신 그에게 토로하는 직원들 앞에선 죄의식을 느끼곤 했다.

1999년 몽골의 고아 실태를 다룬 방송 다큐멘터리를 본 뒤 부부는 상의 끝에 3,000만 원을 들여 몽골 울란바토르의 제빵회사(킹덤베이커리)를 인수했다. 회사 운영 수익금으로 여분의 빵을 만들어 고아들과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자는 취지였다. 'IMF 구제금융 사태'로 한국과 아시아 여러 나라가 힘겨워하던 때였고, 아버지 회사 사정도 예전 같지 않았다. 노사 사이에 끼어 여러모로 시달리던 남편은 직장을 그만두고 혼자 몽골로 떠났다. 부부와 인연이 각별했던 쉴터공동체도 그를 돕기로 했다. 하지만 공동체의 지원 약속은 이행되지 않았고, 경영도 그의 예상처럼 수월하지 않았다. 약 8개월 만에 그는 빈손으로 돌아왔다.

한국국제협력단(KOICA) 지원을 받아 한국의 한 대형교회와 함께 아프리카 세네갈에서 일하던 2017년의 이홍구씨(맨 왼쪽). 그는 현지인 청년 영농-제빵 직업 기술을 가르쳤다. 이홍구씨 제공.

부부는 다국적 종교 교육단체(Destination)가 운영하는 해외 선교봉사 프로그램을 이수한 뒤, 2003년 8월 중국 신장위구르 자치구로 떠났다. 이번엔 서울 성북구의 아파트까지 팔고 온 가족이 이주한 거였다. 아이들은 한국인이라곤 형제 단 둘뿐인 중국인학교를 다녔고, 아내 이씨는 두 아이를 돌보며 주로 현지 여성들을 도왔다. 남편은 안내인 겸 통역가 겸 잡역부로 해외에서 온 의료봉사팀을 이끌고 고원 분지의 소수민족과 타클라마칸 사막 유목민 마을을 누비고 다녔다. 교육 받으며 잠깐 익힌 현지어였지만, 그는 "우리와 같은 우랄-알타이 어족이라 결국은 단어 싸움"이라고 빙긋 웃으며 말했다.

2010년대 이후 중국 정부는 해외 NGO들의 고삐를 죄기 시작했다. 소수민족 지역에 대한 간섭과 통제는 더 심해서, 이씨 역시 당국 허가 없이는 주민 접촉조차 힘들어졌다. 한국의 한 대형교회가 한국국제협력단(KOICA)과 함께 아프리카 선교봉사활동을 하기로 했다며 그에게 도움을 청한 게 그 무렵이었다. 중국 전인대 상무위가 '해외 NGO 국내활동 관리법'(2016년 4월)을 통과시키기 직전인 2015년 말, 이씨 가족은 중국을 떠났다.

교회가 운영하는 경기 안성 교육센터에서 현지에 적용할 미생물 농법과 양계 기술 등을 익힌 부부는 이듬해 아프리카 세네갈로 떠났다. 아내와 아이들은 수도 다카르에 정착하고 남편 이씨는 자동차로 한 시간 거리의 작은 마을 본나바에서 주중엔 주민들과 농사를 짓고 몽골서 익힌 제빵 기술을 가르쳤다. 그렇게 1년 반쯤 지내던 무렵 사건이 터졌다. 현지 숙소에서 지내던 한 봉사대원이 현지 여성 두 명을 상습 성추행한 사건이었다. 이씨는 피해 여성 인터뷰를 통해 그들의 주장이 옳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교회측은 무고라 판단, 사건 자체를 덮으려 했다.

오랜 봉사활동을 하면서 이씨 부부는 보람만큼이나 험한 일, 못마땅한 일도 수없이 보고 겪었다. 강도에게 여권과 지갑을 빼앗기고 갈비뼈가 부러진 적도 있었고, 여자와 땅을 줄 테니 떠나지 말라고 붙잡는 이들도 있었다. 이씨조차 고개 숙이게 할 만큼 헌신적인 이들만큼이나, 시혜자의 우월감을 망토처럼 두르고 으스대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성범죄는 처음이었고, 피해자들을 2차 가해하는 비열함도 처음이었다. 부부는 분노에 앞서, 봉사 NGO 활동가로 살아온 삶 자체가 부정당하는 모욕감을 느꼈다.

이씨 부부는 교회 측에 항의하며 3년 프로젝트 도중에 귀국했다. 그게 아내 이씨가 "대책 없이 한국에 똑 떨어진 기분"이라 썼던 2017년 8월이었다. 부부는 지인들에게 꾼 돈과 은행 전세자금 대출로 서울 외곽에 살 집을 구한 뒤 구직 활동에 나섰다. 에세이에 아내 이씨는 청소노동자가 되기로 한 결심을 적고는 "용기는 절박하면 저절로 생긴다. 그걸 잡아야 살 수 있으니까..."라고 썼다. 그 용기로 헐떡이던 그의 심장이 살려고 찾아든 희망의 자리에서 속절없이 멎던 순간에도 남편은 10분 남짓 걸으면 닿는 자신의 일터(규장각)에서 기계들과 씨름하고 있었다.

서울대 청소노동자 이씨는
"참 희한한 일도 다 있다"고 말했다.
그게 그가 욕하는 방식이었다.


부부는 함께 출근하는 차에서 각자 겪는 일을 들려주곤 했다고 한다. 중간관리자가 바뀌면서 미화원들이 듣도 보도 못한 영어-한자 시험이란 걸 치르게 된 일을 두고도 아내는 남편에게 "참 희한한 일도 다 있다"고만 말했다. 그게 아내 이씨가 욕하는 방식이었다. 시험을 함께 치른 이 중에는 한글을 못 익힌 이가 있었고, 점수가 공개돼 부끄러움과 서러움에 흐느낀 이도 있었다. 회의실에 올 때는 좋은 옷 입고 오라고 했다는 중간관리자의 이른바 '드레스코드' 지시는 과잉 충성이 빚은 해프닝으로 치부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땀에 절어 떡 진 머리를 내보이기 싫어서 회의실에서도 쓰고 있던 미화원의 모자를 한사코 벗게 한 일은 모욕이고 폭력이었다. 아내가 숨진 뒤 서울대 총장을 비롯한 대학본부가 보인 냉담한 거리두기, 대학 보직교수가 SNS에 쓴 "역겨운 피해자 코스프레"라는 말도 고인과 유족을 직접 겨냥한 건 아니었지만 남편과 유족, 노동자들에겐 모욕이었다. 과로사-산재 판정 여부를 떠나, 직원이 학교에서 일하다 숨졌는데 어떻게, 사적으로라도 애도의 말 한마디를 못 하느냐고, 정말 배운 사람들 맞느냐고 그는 물었다. "왜 사람을 모욕하느냐"고, "우리 같은 사람은 모욕해도 된다고 생각하느냐, 우리를 알긴 아느냐"고도 말했다.

그는 청소일에 대한 자신의 생각과 서울대 교수 등 세상의 인식 사이의 아득한 간극에 주저앉지 않기 위해, 아내에게 변명하듯, 아내를 대신해 분노했다. 세네갈에서 겪은 성폭력 피해 여성들의 무기력한 절망, 청소일을 권하던 자신에게 지어 보인 아내의 원망 어린 표정도 그 분노에 스몄을지 모른다. 살기 위해 험한 노동을 하면서도 더 험한 타자의 삶을 생각하며 마음 한쪽은 봉사의 자리에 두고 살아온 그가, 세상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기 위해, 품위를 잃어가는 세상을 향해 던진 질문이기도 했다. 서울대 총장(오세정)은 8월 초에야 이씨를 만나 사과하며 노동자들의 건의사항을 청취했다. 관련자 문책 등 공식 조치는 대학인권센터 자체 조사와 국가인권위 판단이 나올 때까지 유예됐다. 그는 아내와 함께 해온 삶을, 청소 노동을 제안한 일을, 미안하기는 해도 후회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2017년 귀국 직후 14년 만에 다시 한국에 뿌리를 내리기 위해 부부는 직장을 찾고 딸(가운데)은 낯선 학교생활에 적응하느라 분투하던 무렵, 막내(현재 고1, 가운데)의 중학교 전학 절차를 마무리하기 위해 지방을 다녀오다 휴게소에서 찍은 가족 사진. 오른쪽이 고인이 된 부인 이씨. 이홍구씨 제공.

청년이 된 두 아들은, 부모의 기대와 달리 꽤 오래전부터 교회를 안 다닌다. 장남은 중학생이 되던 무렵부터 신앙적 진리와 멀어진 듯한 성직자들과 제도 교회를 못마땅해했고, 이씨 부부는 아들의 생각을 존중했다. 고교 1학년인 막내딸도 요즘 종교를 두고 따질 때가 잦다고 남편 이씨는 말했다. 그는 "신앙을 강요할 수는 없죠. 마음을 돌이켜주면 좋겠지만 안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고교에 진학하며 부모 뜻을 좇아 혼자 부산의 한 기숙학교에 입학한 장남이 1년 만에 중퇴하려 했을 땐 이씨 부부도 한사코 말렸다. "당신들은 힘든 길을 택했지만 아이들은 그러지 않기를 바라셨던 거죠." 장남(만 26세)은 전화 인터뷰에서 "시험을 위해 역사 연도를 외우기보다는 읽고 싶은 책 열심히 읽으며 제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는 군 입대 영장을 받고도 "죽이는 군인보단 살리는 군인이 되고 싶어" 해난구조전대에 자원해 부사관으로 제대했고, 동생(만 22세)도 뒤를 이었다. 장남 이씨는 정형화-제도화된 삶 대신 나름의 삶을 모색하는 지금의 자신이 마음에 든다고, 좋은 영향을 준 부모님이 고맙고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그는 "아버지가 신념을 주도적으로 실천하는 분이라면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를 묵묵히 지지하며 돕는 분이었다"고, "아버지는 좀 어려웠지만 어머니는 속마음도 편하게 털어놓을 수 있는 분이었다"고 말했다.

결혼 30주년이던 지난 11월 9일, 이씨 가족은 아내 없이 2박 3일 제주도 여행을 다녀왔다. 남편 이씨는 1년 남짓 뒤 서울대에서 정년으로 퇴직한 후에는 민간회사에 재취업하거나, 막내도 대학에 갈 테니 혼자 해외 NGO 봉사활동을 나갈 생각이라고 말했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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