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가 22일 글로벌 리더스 포럼에서 연단에 올랐다가 프롬프터가 준비되지 않아 80초 동안 침묵한 일로 입길에 올랐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프롬프터 없이 10분 연설한 것과 비교되며 여당 의원들은 ‘원고 없이는 연설도 못하는 대통령 후보’라고 비아냥댔다. 농담이나 안내 멘트라도 던지며 자연스럽게 넘어가지 못한 윤 후보의 융통성이 아쉽지만 그렇다고 비난받을 잘못을 한 것은 아니다. 침묵하지 말아야 할 진짜 중요한 일들은 따로 있다.
□ 예컨대 평등법(차별금지법) 발의자이자 국회 법사위 간사인 박주민 민주당 의원은 같은 날 지역구인 은평구 주민 500명이 연서명한 입장문을 통해 왜 차별금지법을 심의하지 않느냐는 항의를 받았다. 입법이 시도된 지 14년이 되었고 이번 국회에서 국민청원동의 10만 명을 넘겨 시민의 손으로 국회에 상정했는데도 법사위는 법안 심사 기한을 21대 국회 만료일인 2024년 5월 29일로 미뤄버렸다. 많은 의원들이 “차별은 반대하지만 차별금지법 제정은 아직 때가 아니다”라는 모호한 입장으로 회피하기 바쁘다.
□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가 교제 살인과 관련해 페미니즘의 선동이라고 공격하고 여경 혐오를 부추긴 데 대해서도 정의당만 맞대응할 뿐 민주당은 침묵하는 중이다. 젠더 폭력으로 사망한 피해자를 생각하면 이 대표의 발언은 그냥 넘기기 어려운 막말에 가깝다. 그런데도 이 후보나 민주당 의원들은 '이남자' 표심을 거스를까 모른 척이다. 그나마 “남경·여경의 문제가 아니라 경찰의 기본 자세와 관련된 것”이라고 적절한 원칙을 표명해 혐오에 브레이크를 건 것은 문재인 대통령이었다.
□ 아무리 표가 아쉽다 해도 정치인이 난민, 성소수자, 아동, 장애인, 여성, 비정규직 등 약자를 향한 공격에 대해서까지 침묵해서는 안 된다. 불법을 조장하거나 갈등을 야기하는 등 공동체 가치 훼손을 모른 척해서도 안 된다. 지켜야 할 최저선이자 원칙이다. 표를 얻으려 나쁜 메시지를 던지는 것만큼이나 이에 대해 침묵하는 것도 해악이 크다. 비난받아 마땅한 침묵이 이런 것이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