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의 최측근이었던 동농(東農) 김가진은 대한제국 대신 가운데 독립운동을 위해 망명까지 했던 유일한 인물이다. 1919년 고종 서거 후 73세의 고령에 조선민족대동단 총재를 맡아 일제에 저항했으며, 중국 상하이로 망명해 대한민국임시정부 고문, 김좌진 장군이 이끈 북로군정서 고문을 맡아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장명국 내일신문 대표가 최근 펴낸 ‘대동단총재 김가진’은 조선 헌종 때인 1846년 태어나 일제시대 때 눈을 감은 개화파 관료이자 한국 최초의 재외공관 상주 외교관 중 한 명이었던 김가진의 삶을 다룬다. 조선시대 서얼 출신으로선 보기 드물게 종1품에 오른 그는 일본어와 중국어에 능통해 주일본판사대신을 지내면서 고종의 외교를 도왔다. 이후 안동부사, 농상공부대신, 황해도관찰사, 충청남도관찰사, 중추원의장 등을 역임했다. 관직에서 물러난 뒤엔 대한협회 회장을 맡아 계몽운동에 나섰다.
고종 서거 후 동농은 본격적으로 항일운동에 뛰어들었으나 일제의 감시가 심해지자 아들과 함께 중국 상하이로 망명을 떠났다. 건강이 악화하면서 3년 뒤 1922년 세상을 떠났다. 이 같은 독립운동 이력에도 그는 아직 독립유공자로 서훈을 받지 못했다. 충남관찰사 시절 의병운동을 진압하고 경술국치 당시 일제에 남작 작위를 받은 것이 걸림돌이 됐다. 저자는 그의 의병운동 진압이 단지 고종의 신하로서 한 것일 뿐이란 점 등을 들며 “되도록 그때의 시점에서 그를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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