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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의 정치의 지겨움

입력
2021.11.17 04:3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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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가 TV토론회에서 왕(王)자가 적힌 손바닥을 펴보이는 모습(왼쪽)과 차별금지법제정연대 회원들이 국회의사당 앞에서 정치권에 차별금지법에 대한 입장을 질의하는 모습. 유튜브 캡처·뉴스1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가 TV토론회에서 왕(王)자가 적힌 손바닥을 펴보이는 모습(왼쪽)과 차별금지법제정연대 회원들이 국회의사당 앞에서 정치권에 차별금지법에 대한 입장을 질의하는 모습. 유튜브 캡처·뉴스1

내가 아는 사람들만 해도 지금 유력 대선 후보들보다 대통령을 더 잘할 것 같은 이들을 쉽게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자신조차 믿을 수 없을 때가 있는데 누구를 전적으로 믿을 수 있나 싶기도 하다. 문맹률이 0에 가깝고 똑똑한 이들과 전문가들이 넘치는 오늘날, 우리의 정치 참여가 정책에 대한 투표가 아니라, 여전히 인물에 대한 투표라는 건 지극한 ‘통곡의 벽’이다.

부유하고 가진 게 많은 ‘인물들’의 대의(代議) 정치를 우리는 가슴을 치며 봐 왔다. 보통 사람들은 평생 가 볼 일도 없는 검찰 특수부(권력형 비리 수사부서) 폐지가 최우선 국정과제가 되는 동안, 플랫폼이 노동시장을 잠식하며 일감 중개 명목으로 180만 명 이상 노동자들이 받아야 할 돈의 20%에서 절반 가까이를 떼어 가는 현실은 무법지대로 방치한다. 10만 명의 염원이 담긴 차별금지법 입법청원은 가볍게 깔아뭉개진다. 과연 민주주의는 ‘대의’될 수 있는가.

촛불집회가 한창이던 2016년에도 비슷한 생각을 했었다. 그때도 현실이 답답했던 것 같다. 대학원에서 정치학 강의를 들었는데 기말 보고서에 직접민주주의 방안을 만들어서 내봤다. 청와대와 국회를 그대로 두더라도, ‘통곡의 벽’ 앞에서 멈춘 정책들을 우리가 심의하고 만들 수 있다면.

늘 5,000만 명이 투표하기는 어려우니, 독립된 국가여론조사기관을 설립해 국민 20% 이상으로 정밀한 표본을 정해서 전자투표(혹은 자동응답조사)를 하도록 하고, 60% 이상의 찬성이 있으면 그 정책을 시행하도록 강제하자는 내용을 담았었다. 정책 제안은 누구나 자유롭게 하고, 일정 규모 이상의 지지를 받으면 발의된다. 별도의 조사처에서 전문가들이 법조항을 만들고, 타당성과 찬반 의견을 검토해 국민들이 이해하기 쉬운 보고서를 만들어 공개한다. 투표(여론조사) 대상자 중에 정책 이해도가 떨어지는 경우, 찾아가서 설명하는 서비스도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투표에서 패배하더라도 아예 논의조차 원천차단당하는 지금보다는 낫지 않을까.

어디까지나 ‘공상’이었으나, 교수님이 점수를 잘 줬던 걸로 봐서 아주 허무맹랑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전국민 재난지원금도 쉽게 지급하는 디지털 시대에 국민투표는 누구 좋으라고 전근대적 시각으로만 묶어 놓는지 모르겠다.

물론 대중보다 현명하고 열 일하는 대선 주자가 있다면, 그 세계의 나는 대의 정치를 찬양하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현실은 인물에 대한 논쟁이 정책에 대한 논쟁을 압도하면서, 우리는 날마다 소모적인 진흙탕 속에서 살아간다.

카리스마라는 허상이 통용되고, 근거도 방향도 없이 어떤 인물은 신격화된다. ‘전두환 옹호’ 발언으로 비판을 받은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가 5·18묘지를 참배한 후 ‘상서로운 무지개가 떴다’는 일부의 반응을 보면, 우리는 어느 시대를 살고 있는지 묻게 된다.

전후 일본 정치의 우경화를 비판해왔던 시인 이바라기 노리코(茨木のり子)의 ‘6월’이라는 시에는 ‘민주주의 풍경’으로 느껴지는 대목이 있다. ‘어딘가 사람과 사람을 잇는 아름다운 힘은 없을까/동시대를 함께 산다는/친근함 즐거움 그리고 분노가/예리한 힘이 되어 모습을 드러낼’. 전반적으로 유토피아의 이미지가 떠오르는 시인데, 존재하지 않는 곳을 그리고 있어서일 것이다.

이진희 어젠다기획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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