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다큐 시리즈 '레인코트 킬러: 유영철을 추격하다'
편집자주
다큐멘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반경 너머의 세상을 보여줍니다. 직접 도달하기 어려운 곳을 찾아가 보여주고,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전 세계의 다양한 다큐멘터리를 통해 세상을 보다 넓고 깊게 들여다 봅니다.
신인가수 이승기의 데뷔 곡 ‘내 여자라니까’가 인기를 끌고 SBS 드라마 ‘파리의 연인’이 시청률 50%에 육박하는 기록을 세우던 2004년 7월 하순의 일요일, 끔찍한 뉴스 하나가 한국을 충격에 빠트렸다. 10개월이 넘도록 해결 기미를 보이지 않던 부유층 노인 연쇄 살해사건의 범인이 붙잡힌 것이다. 경찰이 미처 파악하지 못하고 있던 성노동 여성 11명을 비롯해 범인이 살해한 사람은 모두 20명으로 밝혀졌다. 당시 34세였던 그의 이름은 유영철. 피해자는 모두 범인과 아무런 관련이 없던 이들이었다.
영화 ‘추격자’에 모티브를 제공한 유영철은 2003년 9월부터 이듬해 7월까지 범죄를 이어갔다. 처음 두 달간은 서울 강북과 강남의 부촌을 오가며 살인을 저질렀다. 정원이 딸린 고급 단독 주택에 사는 고령층이 주요 대상이었다. 폐쇄회로(CC)TV에 찍힌 뒷모습이 공개된 뒤론 주로 자신의 원룸에 성노동 여성들을 유인해 살해했다. "신사동 사건의 유가족이 사회에 억대 기부한 사실을 보고 부유층 살해는 그만두기로 마음먹었다"는 것이 범죄 대상을 바꾼 이유였다. 잠시 동거했던 여성이 자신과 사귀는 중에도 조건만남을 계속하자 이에 분노해 성노동 여성들을 타깃으로 삼아 범행을 이어갔다.
한국 사회에 연쇄살인범이 나타난 것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유영철의 등장은 ‘살인을 위한 살인’에 빠져 일면식도 없는 이들의 목숨을 앗아간 사이코패스 범죄라는 점에서 충격을 안겼다. 17년이 지난 지금 이 사건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무엇일까.
왜 '레인코트' 킬러인가?
“제가 평생 살면서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잔혹한 이야기들. 다시는 내가 나로 돌아올 수 없다고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황폐한 경험을 했습니다.” 지난달 공개된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시리즈 ‘레인코트 킬러: 유영철을 추격하다’에서 ‘대한민국 1호 프로파일러’ 권일용 동국대 경찰사법대학원 겸임교수는 유영철과의 만남을 이렇게 기억했다. 범죄자들을 대하는 것이 일상인 프로파일러에게도 그는 끔찍한 상대였다.
유영철의 범죄는 고교 시절부터 시작했다. 절도와 폭력 등 전과 14범으로 여러 차례 교도소를 들락날락했던 그는 2003년 9월 출소 후 13일 만에 서울 강남구 신사동에서 노부부를 살해했다. 이후 두 달이 채 지나기 전에 3건의 범죄를 더 저질렀다. 유영철의 범죄 행각은 수많은 뉴스와 TV 시사 프로그램을 통해 알려져 있어 더 이상 자세히 설명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레인코트 킬러’는 유영철이 저지른 범행을 과거 자료 화면과 당시 사건을 수사한 경찰들과 피해자 유족, 변호사, 취재기자의 증언, 재연 영상 등을 토대로 재구성한다. 유영철의 주변 인물을 취재해 그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설명하는 ‘살인범 서사’는 없지만, 그가 수감된 후 월간조선 기자와 나눈 편지를 토대로 한 1인칭 대역 내레이션을 넣어 유영철의 생각을 엿볼 수 있게 했다. 하지만 자신의 범죄를 정당화하는 듯한 발언을 굳이 들려줄 필요가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이를 테면 이런 내용이다. “역사를 보더라도 시대가 혼탁할 때마다 민란이 일어나고 의적의 무리가 나섰습니다. 돈이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는 기준이 된다는 걸 쓰디쓰게 깨달았을 때 응징자가 되어보겠다는 생각을 안 해 본 것도 아닙니다.”
더욱이 유영철의 이 같은 발언을 1997년 외환위기 이후 빈부격차 심화와 연결시키는 대목에선 갸우뚱하게 된다. 범죄 사건을 통해 한국 사회를 엿보고자 했다는 것이 제작진의 의도였다지만, 한국 사회의 문제를 지나치게 단순화한 듯한 인상을 준다. 여기에 세세한 범죄 묘사까지 더해져 보는 이를 더욱 불편하게 한다. 비판적 시선으로 사건을 조명하려는 의도가 보이지 않는 건 아니지만, 자극적인 소재로 호기심을 자극하려는 듯한 인상이 짙어 거부감이 들기도 한다. 제목은 경찰이 유영철 체포 후 언론 공개 현장에서 그에게 별 의미 없이 씌운 노란색 우비에서 가져왔는데 이 역시 그리 적절해 보이진 않는다. 이 다큐멘터리는 수위 높은 폭력 묘사로 인해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을 받았다.
신사·구기·삼성·혜화... 반복 자음 지역이 위험하다?
선뜻 추천하기 어려운 다큐멘터리지만 미덕이 없는 건 아니다. 당시 유영철의 변호를 맡았던 김병준 변호사는 1부 초반에 이렇게 말한다. “내가 지금 할 이야기는 아니지만, 우리나라 경찰 수준이 형편없었다는 거죠. 이걸 계기로 해서 많이 발전했어요.” 실제로 다큐멘터리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경찰들의 증언은 당시 경찰 조직이 어땠는지 추측할 수 있게 해준다.
유영철의 범죄가 이어졌을 때 경찰은 면식범의 소행으로 파악하고 주변 탐문에만 열중했다. 피해자들이 저항한 흔적이 거의 없다는 점, 억대의 현금이나 귀중품을 눈 앞에 두고도 손대지 않았다는 점 때문이었다. 연쇄 사건을 동일범의 소행으로 여기지도 않았다. 경찰청 고위급은 오히려 ‘서울 시내에 연쇄살인범이 돌아다닌다고 하면 시민들이 얼마나 불안해하겠냐’면서 입단속을 시켰다. 강인철 당시 서대문경찰서 수사과장은 관할 지역 중심의 폐쇄적 수사 시스템과 검거 실적 위주 승진 시스템의 허점을 꼬집는다. 박기륜 당시 강남경찰서 과장도 강력사건 해결→홍보→언론보도→특진으로 이어지는 시스템의 문제점을 언급한다. “자잘한 폭력 사건은 제쳐놓고 살인사건 같은 강력범죄에만 매달리던 상황이었어요.”
수사 방식도 21세기 경찰이 맞나 싶을 정도로 원시적이었다. 길거리에서 수상해 보이는 사람을 세워 가방을 뒤지고, 밤길에 지나는 차를 세워 트렁크를 수색하는 식이었다. 아무런 단서도 없이 시간만 흐르자 경찰 일각에선 웃지 못할 추리를 동원하기도 했다. 구기동, 신사동, 혜화동, 삼성동 등 사건 발생 지역 명이 모두 같은 자음으로 시작하니 다음 사건도 수서동 같은 데가 아니겠냐고 예측했단다. 우연하게도 예상은 맞아 떨어졌다. 5개월 뒤 유영철은 다음 피해자를 황학동에서 유인해 살해했다.
유영철의 자백에도 경찰은 믿지 않았다
영화 ‘추격자’에서 나오듯 유영철의 꼬리를 잡은 건 경찰이 아닌 전직 경찰 출신 매춘업소 사장이었다. 7월 15일 새벽. 그는 5834(그가 쓰던 휴대전화의 끝 번호는 1818이었다고 한다)로 끝나는 번호의 전화를 받았다. 같은 번호의 전화를 받고 나간 여성들이 사라지는 일이 잇달아 벌어진 상황에서 같은 번호로 다시 전화가 걸려온 것이다. 유영철은 들키지 않기 위해 서로 다른 업소에 전화를 걸었지만, 이름과 전화번호만 다를 뿐 한 업주가 운영하고 있었다는 걸 몰랐다. 경찰에 체포된 순간에도 그의 입에선 명함 크기의 전단지가 잔뜩 쏟아져 나왔다.
한국 경찰이 이 정도였나 싶을 만큼 참담해지는 건 오히려 유영철을 잡고 난 후부터다. 경찰은 그를 잡범으로 여겼다. ‘내가 노인들을 죽였다’면서 으스대는 그에게 ‘넌 사람을 죽일 재목도 안 된다’며 무시했다.(살인 범죄를 이어가는 와중에 절도로 잡힌 적도 있는데 그때도 그는 풀려났다) 성노동 여성 연쇄살인 사건은 한 건도 신고되지 않아 경찰은 범죄행각 자체를 알지 못했다. 자신을 무시하자 유영철은 종이와 펜을 달라고 한 뒤 바를 정(正)을 한 획씩 써내려 갔다. “영철아, 이게 뭐냐?” “반장님, 내가 사람 죽인 숫잡니다.”
경찰은 그때도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곧바로 구기동 범죄 현장까지 끌고 갔지만 유영철은 장난 치듯 실제 현장이 아닌 뒷집을 가리켰다. 포승줄에 묶인 채로 길거리 강아지에게 장난을 거는 어이 없는 상황까지 연출했다. 경찰들은 고개를 저었다. “전부 다 ‘이 놈 아니다, 이 놈 살인범 아니다’ (그랬어요.) 평범한 사람 같으니까 잡범으로 생각한 거지.” 박명선 당시 서울시 경찰청 기동수사대 형사는 회고했다.
체포되고도 경찰서에서 두 발로 유유히 걸어나오다
경찰청 조사실로 돌아간 유영철은 익숙한 수법으로 경찰을 방심하게 했다. 게거품을 물고 간질 발작을 하며 쓰러진 것이다. 과거 절도 사건으로 체포됐을 때 도주했던 방법이었다. 이윽고 두 팔을 묶고 있던 수갑이 풀렸다. 형사들이 잠시 방심하고 자리를 비운 사이 유영철은 조사실 밖으로 걸어 나와 유유히 경찰서를 탈출했다.
유영철이 다시 체포될 수 있었던 건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경찰을 무시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다음날 길거리를 유유히 활보하다 경찰의 눈에 띄어 붙잡혔다. 경찰 스스로 밝히듯 ‘서울에서 김서방 찾기’ 식이었는데 운이 좋아 잡을 수 있었다. 그런 경찰에게 유영철은 두 팔을 붙잡히면서도 “너희들이 나를 상대할 정도가 아니다”라고 큰소리쳤다.
유영철은 경찰이 자신을 잡은 것이 아니라 자수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스스로 경찰서에 걸어 들어가지만 않았을 뿐 백지 상태인 경찰에게 모든 범죄 사실을 자발적으로 말해줬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당시 경찰은 “우리 수사관의 기법과 범인의 자포자기가 섞여서 자백을 이끌어냈다”고 포장했다. 누군가의 제보가 없었다면, 유영철이 자아도취에 빠져 자백하지 않았다면, 경찰이 단서 하나 못 찾고 계속 헤맸다면, 그의 광기 어린 호언처럼 피해자가 100명까지 늘었을 수도 있다.
유영철, 한국 경찰의 수사 시스템을 바꾸다
사람이란 소를 잃어봐야 고장난 외양간을 고치는 존재다. 유영철을 처음 체포한 양필주 당시 서울지방경찰청 기동수사대 형사는 “유영철 사건을 계기로 시스템이 싹 바뀌었다”고 말한다. 실제로 이 사건 이후 관할서 위주의 주먹구구식 수사방식이 점자 사라지고 과학수사가 자리를 잡아갔다.
다큐멘터리 3부가 끝날 무렵 김희숙 서울지방경찰청 과학수사팀장은 “이렇게 사건을 많이 잘 해결하는 나라는 유례가 없을 것”이라면서 “국민들이 감사함을 잘 모르는 것 같다”고 아쉬워한다. 그의 말처럼 한국은 세계적으로 치안이 꽤 좋은 편에 속한다. 살인사건 검거율이 100%를 기록하기도 했다는 그의 말 역시 사실이다. 경찰백서에 따르면 2017년, 2019년은 발생 건 수보다 검거 건 수가 많았다.(사건 발생 연도와 검거 연도가 달라서 생기는 차이다) 살인 강도 성폭력 절도 폭력 등 5대 강력범죄 검거율은 2011년 62.1%에서 지난해 77.8%로 높아졌다.
그러나 검거율이 2018년 78.1% 이후 다소 정체 현상을 보이고 있는데다 강력범죄 수사에 집중하느라 생활형 범죄에 대한 검거율은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는 비판도 있다. 무엇보다 여성 1인 가구가 주로 타깃이 되는 주거침입 범죄 발생 건수가 늘고 있는 데 반해 검거율이 오히려 감소하는 현상은 우려스럽다. 경찰청 자료에 따르면 여성 피해 주거침입 범죄는 2016년 6,034건에서 지난해 9,751건으로 61.6%나 증가했다. 이와 반대로 주거침입자 검거율은 2016년 75.7%에서 지난해 72.6%로 오히려 감소했다. 데이트 폭력 범죄는 더하다. 신고 건 수는 2016년 9,364건에서 2020년 1만 8,945건으로 2배가 됐는데 정작 검거율은 같은 기간 96%에서 52%로 거의 반토막이 났다.
유영철 사건이 발생했을 때만 해도 전문가들은 개인의 일탈 탓으로 치부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이 사건은 여성혐오로 촉발된 최초의 대량 학살 범죄였다. '사람 가지고 장난 치고 남자들 등쳐먹는 여자'들을 살해하려 했다는 말부터 월간조선 기자와 나눈 편지에서 드러낸 여성에 대한 증오, 체포된 뒤 카메라 앞에서 “여자들이 함부로 몸을 놀리거나 하는 일이 없었으면 한다”고 했던 발언까지 여혐 범죄를 부정할 만한 단서는 거의 없다.
유영철은 복잡한 내면을 지닌 살인광이었다. "아들이 줬던 정신적 위안과 행복감은 세상 무엇과도 비교가 안 됐다"면서도 한때는 아들을 살해할 생각도 품었다고 했다. 가장 공포스런 순간으로 꼽았던 것도 범죄 행각 중 아들에게 전화가 걸려올 때였다고 말했다. 전처를 사랑하면서도 죽이려 했고, 살인 목적으로 유인한 성노동 여성 중 6명은 '정' 때문에 그냥 보냈다고도 했다. 정을 갈구하면서도 여성들을 무참히 살해하며 범죄를 즐기는 사이코패스 범죄자였다.
물론 여성혐오만으로 이 사건을 온전히 설명할 순 없다. 프로파일러 출신 표창원 전 의원은 지난해 방송된 MBC ‘시사매거진 2580’에서 연쇄살인범의 분노의 공격성을 그들 개인의 문제라고만 볼 수는 없다면서 “우리 사회에 이미 차별이 공고화해 있고, 사람을 존중하지 않는 사회가 돼 있다”고 지적했다. '희대의 연쇄살인'이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지 17년, 한국 사회에 뿌리 깊이 박힌 차별은 얼마나 줄었을까. 여성이 살기에 얼마나 안전한 나라가 됐을까. 유영철 사건이 남긴 트라우마는 아직도 아물지 않은 채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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