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입생 시절 학과 선배에게 성폭력당해"
모교 온라인 커뮤니티에 고백글 올려 파장
"다른 피해자들 돕고 가해자 사죄받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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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년 전 성폭력 피해를 밝힌 김모씨가 15일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한국일보 기자와 만나 대화를 나누고 있다. 오지혜 기자
"내가 그때 용기를 냈다면, 지금 불거지고 있는 성폭력 피해들이 미연에 방지되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가 남았습니다."
이달 15일 오전 6시쯤 고려대 학생들의 온라인 커뮤니티 '고파스'에는 '나는 나를 고발한다'는 제목의 글이 올라왔다. 익명 게시판이지만 본인의 이름과 신원을 공개한 글쓴이는 재학 시절 성폭력 피해 사실을 밝히고 당시 불의에 맞설 용기를 내지 못한 자신을 자책했다. 28년 만의 미투(Me Too·성폭력의 사회적 고발)로 큰 반향을 일으킨 이는 이 대학 졸업생 김모(47)씨다. 글을 올린 당일 한국일보와 인터뷰한 김씨는 "그땐 아니었지만 지금의 나는 싸울 수 있다"며 숨겨 온 고통을 세상에 알린 이유를 밝혔다.
성폭력 피해 '자업자득'이라던 시절
김씨가 성폭력을 당한 건 고려대 예비 신입생으로 오리엔테이션(OT)에 참여했던 1993년 2월이었다. 가해자는 김씨보다 다섯 학번 높은 같은 과 선배 A씨였다.
그날 OT 장소인 설악산 인근 콘도에서 있었던 회식은 김씨가 난생 처음 술을 마신 자리였다. 취기와 피곤에 이내 졸기 시작한 김씨가 정신을 차린 건 방으로 와서 잠든 지 몇 시간이 지나서였다. 그는 "이상한 느낌에 잠에서 깼을 땐 청바지 지퍼가 끝까지 열렸고 몸엔 기운이 하나도 없는 상태였다"면서 "A씨가 맞은편에서 자고 있는 걸 보고 혼란에 빠져 방에서 나와 곧장 화장실로 향했다"고 말했다. 뒤이어 깨어난 A씨는 대뜸 김씨에게 '고려대 신입생 필독서 30선'이 나열된 종이를 쥐여 주고는 자리를 떴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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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김씨는 이 일을 묻고 살기로 했다. 학교에서 A씨를 마주쳐도 모른 척 지나갔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을 둘러싼 세상이 모두 무너질 것 같아서였다. 고려대 교수로 재직했던 조지훈 시인이 좋아서 이 학교 진학을 결정했다는 김씨는 "다른 진로를 바라던 가족들의 반대를 7일간 단식투쟁 끝에 물리치고 입학한 학교였다"면서 "'자업자득' '네가 조심하지 않아서 일어난 일'이라는 이야기를 들을 게 뻔했다"고 했다. 당시 우리 사회의 성인지 감수성 또한 그런 우려를 자아내기에 충분했던 게 현실이었다.
가슴에 맺힌 응어리 때문인지, 이후 정신질환도 심하게 앓았다. "대학교 4학년 때 영국 어학연수를 다녀온 뒤 양극성 정동장애를 앓게 됐어요. 그 사건이 발병 원인 중 하나였던 것 같습니다. 이성을 만날 때도 그때 일이 트라우마로 남아 홍역을 치르기도 했고요." 대학을 졸업하고 1년 넘게 집에서 칩거한 적도 있었다. 간호사라는 새 진로를 찾은 지 십수 년이 지난 지금도 김씨는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다.
"이제라도 입을 연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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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갓 스물이던 성폭력 피해자는 어느덧 쉰을 바라보는 나이가 됐다. 세월이 흘러 가해자에 대한 실질적 처벌이 어려워진 시점에 김씨가 입을 연 것은 또 다른 성폭력 피해자들에 대한 부채의식 때문이었다. "특히 미투가 불거져 나올 때마다 힘이 들었습니다. 그때 내가 용기를 냈더라면 하는 후회가 들었어요. (내 고백이) 가해자를 향한 경고가 됐으면 합니다."
피해자들에게 든든한 지지자가 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만일 당시 나를 도와주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이렇게 힘들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늘 마음에 남아서다. 김씨는 "지금도 2차 가해에 대한 우려, 약한 자아 등의 이유로 피해 사실을 밝히지 않는 이들이 많다"면서 "그들이 숨지 말고, 적극적으로 치료받고, 사회적으로 도움을 받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아울러 김씨는 A씨의 진정한 사죄를 바라고 있다. 김씨에 따르면 사건 이후 몇 년이 지나 A씨에게 사과를 요구하자 그가 김씨 가족이 사는 집에 찾아온 적이 있었다. 그러나 A씨는 경위서를 쓰면서 '예뻐서 그랬다'고 적었고, 김씨는 반성이 느껴지지 않는 내용에 더욱 분노해 그 자리에서 찢어 버렸다고 한다.
A씨는 본보와의 통화에서 김씨 주장을 일부 인정했다. 그는 "술에 취해 기억은 잘 안 나지만, 여학생 방에서 잠들기 전 불미스러운 접촉이 있던 것 같다"면서 "10년 전쯤 사과를 했지만, 잘못에 대해 재차 사과할 의향이 있다"고 말했다.
"선배님 응원합니다" 고백에 응답한 후배들

김모씨가 고려대 커뮤니티 고파스에 올린 글에 달린 댓글. 고파스 캡처
김씨의 글에 동문들은 앞다퉈 지지와 위로를 표명하고 있다. 한 댓글 작성자는 "선배님 심정을 다는 모르겠지만, 그나마 할 수 있는 거라곤 마음 아파하는 것뿐이라 속상하다"면서 "죄 지은 사람은 처벌받고 선배님께서는 부디 마음의 평화를 찾으면 좋겠다"고 했다.
자신의 피해 사례를 밝히는 이들도 있었다. 7~8년 전 비슷한 피해를 겪었다는 졸업생은 "그날 가해자를 바로 신고하지 못한 제 자신이 원망스럽고, 도와 달라는 말에 쉬쉬하며 덮자고 설득한 이들이 원망스럽다"며 "선배님의 용기에 이렇게 댓글로밖에 응원하지 못하는 제가 비겁하게 느껴진다"고 적었다.
전문가들은 김씨의 고백과 이에 대한 호응을 두고, 우리 사회가 성폭력 피해자의 목소리에 보다 귀 기울이고 있다는 방증이라고 해석했다.
김혜정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은 "성폭력은 신고와 처벌, 정책 수립만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고백에 대한 사회적 지지가 중요하다"면서 "김씨 글에 응원 댓글이 달리는 양상을 보면, 미투 운동을 계기로 성폭력 피해를 한층 분명하게 드러내고 비판하는 방향으로 변화한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한소망 활동가는 "우리 사회는 김학순 운동가의 위안부 피해 고백마저 비판할 만큼 성폭력 피해를 축소·왜곡하는 경향이 있었지만, 지금은 피해자 목소리가 가리키는 쪽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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