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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보다 못난 정부

입력
2021.11.15 04:30
수정
2021.11.15 10:14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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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일 오전 울산시 남구 상개동 한 주유소 주변 도로에 요소수를 넣으려는 화물차들이 길게 줄을 서 대기하고 있다. 울산=연합뉴스

9일 오전 울산시 남구 상개동 한 주유소 주변 도로에 요소수를 넣으려는 화물차들이 길게 줄을 서 대기하고 있다. 울산=연합뉴스

이번 요소수 대란에서도 빛을 발한 건 우리 국민의 위기극복 DNA였다. 요소수 품귀 현상이 빚어지자 지역 소방서에 기부 행렬이 이어졌다. 무슨 일이 있어도 소방차와 구급차가 멈춰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쪽지나 편지 하나 없이 현관 앞에 요소수와 간식을 놓고 홀연히 떠난 사람도 많았다. 누군가 이름 지은 ‘요소수 천사’라는 말밖에는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다.

위기가 닥치면 작은 힘이라도 보태려는 모습은 1997년 외환위기 당시의 ‘금 모으기 운동’, 2007년 태안 앞바다 기름 유출 사고 때 전국에서 모여든 자원봉사자의 헌신을 떠올리게 한다. 왜 또 국민이 나서야 하는지 화가 나고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정부는 뭘 하고 있었나 원망스럽다가도, 당장은 위기극복이 우선이라며 솔선수범해 나눔 정신을 실천하는 모습을 보면서 참 대단한 국민이라는 생각에 감정이 누그러진다.

복기해보면 정부는 상황의 심각성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중국 현지 공관이 요소 품귀 우려를 외교부에 전달한 시점은 지난달 21일이다. 중국이 수출 규제를 고시한 날로부터 열흘이나 지난 늑장 보고도 문제지만, 그나마도 요소수에 대한 내용은 없고 비료 수급 문제만 담은 반쪽짜리 보고였다. 때문에 현장에서 요소수 부족 우려가 제기된다는 사실을 언론이 보도한 지난달 말까지도 정부가 취한 조치는 하나도 없었다.

요소수는 디젤 엔진에서 나오는 배기가스를 정화하는 데 쓰는 촉매제로 대단한 기술이 필요한 물자는 아니다. 결국 대란 사태의 원인은 기술력보다는 글로벌 공급망 변화에 대한 이해 부족이나 안이한 판단에 있었던 셈이다. 친환경을 한다며 요소수 장착을 의무화해 놓고 정작 요소의 98%를 중국 수입에 의존하도록 방치한 건 국가를 마비시킬 수 있는 급소를 고스란히 노출해놓고도 그 위험성조차 몰랐다는 얘기다.

지금 세계는 기후위기에 따른 에너지 대전환 시기를 관통하고 있다. 주기적 팬데믹과 미중 패권 전쟁이라는 변수도 도사리고 있다. 요소와 같은 단순한 소재도 언제든 전략물자로 둔갑할 수 있고 원료 부족이 아닌데도 갑자기 공급절벽이 올 수 있는 환경이다. 그런데도 특정국가 의존 비율이 80% 이상인 품목이 3,941개에 달한다고 하니 그동안 정부는 뭘 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일본의 반도체 부품 수출규제 2년을 맞은 올 7월의 분위기가 생각난다. 정부는 핵심 부품의 대일 의존도를 현저히 줄였을 뿐만 아니라 소재ㆍ부품ㆍ장비 산업이 강화되는 성과를 얻었다고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당정에선 ‘아무도 흔들 수 없는 나라가 됐다'는 자화자찬이 흘러 넘쳤다. 하지만 넉 달도 안 돼 대한민국은 경제안보 공습에 술술 뚫리는 무방비 나라인 것으로 드러났다. 이러니 문재인 정부는 위기가 닥치면 ‘죽창가’ 같은 정서적 호소나 ‘보여주기 쇼’로 대응하는 데만 유능하다는 비아냥이 나오는 것 아닌가.

지금 정말 필요한 것은 위기 발생을 사전에 방지하는 '위기 관리' 능력이다. 이번에도 정부 차원에서 수입처를 다변화하고 보조금을 줘서라도 국내에 요소 생산시설을 남겼어야 했다. 상황이 나아졌다지만 앞으로도 화물차 운전자는 배급제 실시로 매번 주유소에서 줄을 서야 할 신세다. 이게 “비싼 수업료를 냈다고 생각한다”는 말로 어물쩍 넘어갈 일인가 싶다. 아무리 봐도 국민보다 못난 정부다.


전국에 요소수 품귀 현상이 빚어지는 가운데 지난 5일 오후 한 시민이 인천의 한 119안전센터에 요소수 3통을 기부하고 사라져 주변을 훈훈하게 하고 있다. 연합뉴스

전국에 요소수 품귀 현상이 빚어지는 가운데 지난 5일 오후 한 시민이 인천의 한 119안전센터에 요소수 3통을 기부하고 사라져 주변을 훈훈하게 하고 있다. 연합뉴스


김영화 뉴스부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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