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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아톰’ ‘도라에몽’ 휴머노이드 오랜 관심, 한국은...

입력
2021.11.13 04:30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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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일본 사회와 로봇

편집자주

우리에게는 가깝지만 먼 나라 일본. 격주 토요일 연재되는 ‘같은 일본, 다른 일본’은 미디어 인류학자 김경화 박사가 다양한 시각으로 일본의 현주소를 짚어보는 기획물입니다.

사진은 ‘헨나호텔 (変なホテル, 일본어로 ‘이상한 호텔’이라는 장난스러운 명칭이다)’. 이곳에서는 휴머노이드 로봇이 고객을 맞는다. 일러스트 김일영

사진은 ‘헨나호텔 (変なホテル, 일본어로 ‘이상한 호텔’이라는 장난스러운 명칭이다)’. 이곳에서는 휴머노이드 로봇이 고객을 맞는다. 일러스트 김일영


“사족 보행 로봇에 ‘학대’?", 비상식적 논란을 접하고

얼마 전 로봇 전시회를 참관한 여당의 대통령 선거 후보가 사족 보행 로봇을 밀어 넘어뜨린 장면이 전파를 탔다. 몇몇 언론에서 ‘학대’라는 자극적인 용어를 동원해 “로봇을 가혹하게 취급했다”고 후보의 태도를 비판했고 일부 지식인들이 이에 편승해 논란을 키웠다. 디지털 미디어에 대한 연구 분야에서도 로봇은 첨예한 키워드다. 과거에 전기 미디어나 인터넷이 사회를 크게 변화시킨 것처럼, 로봇이라는 미디어의 대중화가 인류 역사의 극적 전환점이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나 역시 미디어 연구자로서 로봇에 대한 이슈는 재빨리 파악해 두는 편인데, 이 비상식적인 보도 소동에는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2015년 일본에서 인간이 로봇에 폭행을 가한 사건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소프트뱅크 사에서 막 판매를 시작한 양산형 휴머노이드 (humanoid, 인간을 뜻하는 ‘human’과 닮은 것을 뜻하는 접미사 ‘oid’의 합성어로 인간형 로봇을 총칭한다) ‘페퍼’가 한 휴대폰 매장에서 간단한 접객 업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그런데 술에 취한 채 매장을 찾은 한 남성이 직원과의 말다툼 끝에 화풀이로 페퍼에 발길질을 한 것이었다. 처음에는 ‘로봇 폭행 사건’이라고 기사화되었지만 현행범으로 체포된 용의자의 죄명은 기물손괴죄였다. 로봇은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폭행죄가 성립하지 않았다. 발길질로 쓰러진 페퍼는 외부 자극에 대한 반응이 느려지는 등의 문제가 있었지만 이후에는 정상 업무에 복귀할 정도로 회복했다고 한다. 이 사건이 세간의 관심을 끌었던 배경에는 특별한 맥락이 있다. 페퍼는 독자적인 감정 알고리즘을 갖춰서 인간과 정서적인 소통이 가능한 로봇이었다. 즉, 이 사건은 취객이 감정이 있는 로봇에 폭력을 휘두른 해프닝으로서 인간과 로봇이 공존하는 미래 사회의 윤리적 딜레마를 예고하는 서막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정서적 능력을 갖춘 로봇을 둘러싼 윤리적 논쟁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사족 보행이 주기능인 로봇의 완성도를 가늠하기 위해 균형을 무너뜨려 보는 시도를 ‘학대’라고 왜곡하는 데에는 실소가 나온다. 문제의 본질은 인간과 휴머노이드의 정서적 접점에 대한 해석인데, 이 사안에는 그런 측면이 끼어들 여지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전문적인 사안을 자의적으로 왜곡하는 보도는 건강한 논의를 가로막고 결과적으로 사회적 비용을 증가시킬 뿐이다. 정치적인 성향과는 무관하게, 이런 사안을 여과없이 정쟁에 끌어들이는 무책임한 언론에는 귀를 기울이지 말라고 조언하고 싶다. 다만 덕분에 이 칼럼에 일본 사회와 로봇에 대한 주제를 소개할 계기가 생긴 것은 사실이니, 어처구니없는 언론 보도도 긍정적인 역할을 할 때도 있다고나 할까?

휴머노이드에 대한 일본 사회의 상상력

일본 사회에서 로봇은 오래전부터 각별한 존재감을 발휘해 왔다. 휴머노이드를 개발하기 위한 노력이 꾸준히 있었고 성과도 적지 않았다. 2000년에 세계 최초로 두 발로 걷는 로봇 ‘아시모’가 상용화되었다. 앞서 소개한 페퍼는 정서적 공감 능력과 학습 능력을 갖춘 선구적인 휴머노이드였다. 로봇이 서비스하는 무인 숙박 시설 ‘헨나 호텔’도 있다. 지난해에는 로봇 승려 ‘로보우’가 사람들과 선문답을 나누는 장면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런 끊임없는 시도가 늘 성공적이지는 않다. 아시모는 축구도 하고 악기도 연주할 수 있지만, 실생활에서의 쓰임새가 한정적이어서 상용 모델로는 재미를 못 보았다. 페퍼와 몇 번 대화를 해 보니 이야기가 뚝뚝 끊어져서 스마트폰의 음성 인식 서비스에 말하는 것이 낫다고 느낄 정도였다. 헨나호텔도 가 보았는데, 로봇만으로는 대처 불가능한 사안이 많아서 직원이 상주하고 있었다. 다만, 이런 실패 역시 휴머노이드 기술의 사회적인 효용을 검증할 수 있는 소중한 경험이라는 점은 틀림없다. 특히, 사회가 고령화할수록 중요해지는 의료, 간호, 방재 등의 분야에서 휴머노이드의 활약이 기대된다. 이 분야에 관한 한 일본 사회에 축적된 풍부한 경험과 노하우를 무시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일본의 전설적인 만화가 데즈카 오사무(手塚治虫)가 1950년대에 선보인 만화 <철완 아톰>은 휴머노이드 ‘아톰’이 주인공이다. 그는 정의감이 뛰어나고 선악을 구분할 줄 알지만, 로봇이라는 자기 정체성에 대해 고민도 많고 마음 속 갈등도 겪는다. 인형처럼 귀여운 용모에 인간적인 면모가 적지 않아 누구나 친근감을 느낄 수 있는, 아주 특별한 로봇이다. 많은 어린이들의 사랑을 받는 캐릭터 ‘도라에몽’은 오동통한 고양이 인형의 모습을 한 로봇이다. 미래에서 타임머신을 타고 왔는데 주인공이 곤란에 빠질 때마다 기발한 도움을 준다. ‘건담’, ‘마징가Z’, ‘에반게리온’ 등 인간이 조종하는 전투형 휴머노이드 캐릭터도 꾸준히 인기를 끌고 있다. 일본의 SF 장르 속에서 로봇들은 한마디로 ‘좋은 녀석들’로 묘사된다. 인간을 돕고, 인류를 구원하고, 귀엽고 친근해서 늘 곁에 두고 싶은 친구 같은 존재다. 실제로 일본의 많은 로봇 연구자들은 아톰이나 도라에몽에 대한 동경으로 로봇 분야에 뛰어들었다고 실토한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일본에서 휴머노이드 기술이 눈부시게 발전한 이면에는 SF만화나 애니메이션에서 시작된 상상력의 영향을 부정하기 어렵다.

한편, ‘로봇은 친구’라는 일본의 낙관적인 ‘로봇관’을 서양 사회는 이질적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인간은 신의 피조물’이라는 기독교적 세계관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인간이 아닌 존재에 대한 뿌리깊은 거부감이 있다 보니, 인간과 비슷하지만 인간이 아닌 휴머노이드에 대한 저항이 크다. 로봇에 대한 이미지는 친근함보다는 공포에 가깝다. 실제로 할리우드에서 제작된 많은 SF영화 속에서 로봇은 높은 확률로 위험한 존재로 묘사된다. 그런 사고 방식에서는 로봇이 스토리의 주인공이 되거나, 인간을 구원하는 주체가 되는 설정이 무척 낯설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온갖 사물에 마음이 깃들어 있다’는 일본의 전통적 종교관이 휴머노이드라는 개념을 오래전부터 잉태하고 있었다는 독특한 분석도 나온다. 다만 개인적으로는 근대 이후 일본 사회가 걸어온 궤적 속에서 로봇 분야에 대한 각별한 관심이 커져 왔다는 가설이 더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19세기 말 메이지 유신 이후 지속적으로 ‘과학 기술 입국’을 부르짖었고, 원자 폭탄이라는 최첨단 과학 기술이 만든 병기로 패전을 맞았으며, 과학 기술의 힘으로 전쟁 폐허에서 나라를 재건했다. 일본에서는 과학 기술 분야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줄곧 높았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만화나 애니메이션 등 대중적인 SF장르와 결합하기 쉬운 과학 기술 분야, 즉 로봇에 대한 상상력이 한껏 부풀었고 그 속에서 휴머노이드에 대한 사회적 이해도가 높아졌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로봇이나 인공 지능에 대한 사회적 이해도가 높아져야 한다

한국에서도 로봇이나 인공 지능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는 있지만, 이런 새로운 기술이 커 나갈 수 있는 사회적 환경을 갖추기에는 갈 길이 멀다. 칼럼의 첫 부분에서 ‘정치인과 로봇 학대’를 둘러싼 논란을 언급했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이야기가 언론에서 버젓이 흘러 나온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로봇이나 인공 지능에 대한 일천한 이해도와 빈곤한 상상력을 드러내는 것이다. 사실 우수한 과학자와 기술자를 육성하는 교육적 환경에 못지않게, 새로운 과학 기술을 이해하고 변화의 본질을 성찰하는 사회적 환경이 중요하다. 어떻게 보면 후자가 전자보다 더 중요하다고도 할 수 있다. 과학 기술에 대한 사회적 이해도가 높아지면 그 속에서 우수한 과학자와 기술자가 스스로 커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저 과학자와 기술자를 키우자고 부르짖을 것이 아니라, 과학 기술의 진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사회적, 인문학적 안목을 고민할 때다.

김경화 미디어 인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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