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급망 붕괴, 원자재 가격 상승 맞물려
"인플레이션 들불처럼 번진다" 우려도
금융시장, 美 연준 기준금리 인상 예상
‘물가 상승(인플레이션) 쓰나미’가 전 세계를 덮치고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응을 위해 시중에 풀린 막대한 유동성과 공급망 붕괴, 원자재 가격 상승이 맞물리면서 세계 경제를 이끄는 G2(미국과 중국)는 물론, 신흥국 물가까지 전례 없는 수준으로 치솟았다. 1970년대 ‘초(超)인플레이션’ 재현을 우려하는 목소리까지 나오는 상황이다. 그동안 물가 상승은 일시적이라고 선을 그어온 미국 중앙은행이 결국 기준금리 인상에 시동을 걸 가능성마저 커지자 세계 금융시장도 잔뜩 긴장했다.
美 소비자물가 31년 만의 최고치
10일(현지시간) 미국 일간 뉴욕타임스 등 외신을 종합하면, 각국에서 물가 급등을 경고하는 지표가 쏟아지면서 지구촌에 인플레이션 먹구름이 짙어지고 있다. 이날 미국 노동부가 발표한 지난달 소비자물가지수(CPI)는 작년 같은 달보다 6.2%나 급등했다. 시장 예상치(5.9%)를 훌쩍 뛰어넘는 수준으로, 해당 상승률이 6%를 넘은 것은 1990년 12월 이후 약 31년 만에 처음이다. 인플레이션 압력은 광범위하게 나타났다. 휘발유(49.6%)뿐 아니라 중고차(26.4%) 육류·계란·생선(11.9%) 신차(9.8%) 주거비(3.5%) 등 가격이 안 오른 분야를 찾기 어려울 정도다. 변동성이 큰 에너지·식품을 제외한 근원 소비자물가 상승률도 4.6%로, 최근 30년 사이 가장 높은 수준을 보였다.
전날 발표된 미국과 중국의 생산자물가 역시 ‘최고치’ 일색이었다. 미국 10월 생산자물가지수(PPI)는 전년 동기 대비 8.6% 올라 11년 만에 가장 높은 수준을, 중국은 13.5% 뛰며 통계가 시작된 1995년 이후 26년 만에 사상 최고 상승률을 각각 기록했다.
세계 경제 양대 축인 두 나라만의 얘기가 아니다.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4.1%)과 한국(3.2%)의 지난달 소비자물가는 거의 10년 만에 가장 높은 상승률을 보였다. 브라질 역시 최근 12개월 물가 상승률(10.67%)이 2016년 이후 가장 가파르게 올랐다. 일본이 11일 발표한 생산자물가도 전년 동기 대비 8% 뛰어 40년 만에 최고 상승폭을 기록했다. 물가 앙등 분위기는 선진국과 신흥국을 가리지 않고 있다는 의미다. 손성원 로욜라메리마운트대 교수는 미 CNBC방송에 “인플레이션이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생산자물가는 생산자가 시장에 공급하는 상품과 서비스 가격을 표시하는 지표다. 올해 들어 경기 회복세와 풍부한 유동성 속에 재화·서비스 수요가 늘어난 반면, 공급망 붕괴와 원자재 가격 상승으로 기업들의 비용 부담이 커졌다. 생산자물가가 오르자 기업들이 인상분을 제품 및 서비스 가격에 반영하면서 가계에 직접적 영향을 미치는 소비자물가마저 오른 셈이다.
”1970년대 인플레와 패턴 유사”
예상 밖 결과가 쏟아지자 미국 정부와 월가는 충격에 휩싸였다. 백악관은 이날 이례적으로 “물가 상승세를 뒤집는 것이 최우선 과제”라는 성명을 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이 직접 나서 방안 마련을 지시할 정도다. 사실 인플레이션 우려가 고개를 든 건 하루이틀 일이 아니다. 그러나 정부와 시장은 이번 지표를 ‘상승 압력이 전방위로 확산하고 있다’는 증거로 본 것이다.
미 정부의 총력전 선언에도 당장 눈앞에 닥친 상황은 밝지 않다. 일단 ‘세계 소비 기지(미국)’와 ‘세계의 공장(중국)’ 상황이 좀처럼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여전히 최악의 공급망 대란과 에너지 대란으로 두 나라 모두 허덕이고 있다. 여기에 각국이 속속 위드 코로나를 선언하면서 소비 심리는 빠르게 되살아나고 있다. 특히 소비자물가가 생산자물가의 후행지표라는 점을 감안하면 당분간 가격 상승세가 이어질 것이란 관측이 많다.
마이클 페롤리 JP모건체이스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블룸버그통신에 “11월 소비자물가는 6.8%까지 오를 것”이라며 “에너지와 주택 가격 급등세가 지속하는 데다 기저효과까지 작용해 내년 봄까지는 물가 상승이 더욱 심화할 수 있다”고 말했다. “현재 패턴이 인플레이션이 극심했던 1970년대와 유사하다(아서 래퍼 전 시카고대 교수)”는 지적도 나왔다. 1960년대 2% 안팎을 오가던 물가상승률은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 초에는 7%대 중반까지 급등했는데, 이 같은 상황이 반복될 수 있다는 얘기다.
인플레 공포에 금융시장 쇼크
인플레이션 공포에 전 세계 금융시장은 크게 출렁였다. 연일 강도를 높이는 물가 상승 압력이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조기 금리 인상을 부채질할 것이란 우려가 반영된 결과다. 연준은 이달 말부터 테이퍼링(자산 매입 축소)을 시작한다고 예고하며 돈줄 조이기에 시동을 걸었다. 다만 지금까지는 인플레이션을 일시적 현상으로 치부하며 기준금리 조기 인상 가능성을 일축해 왔다. 하지만 이날 시장은 금리 인상 시간표가 앞당겨질 가능성이 크다고 본 것이다. 정책금리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미 국채 2년물 금리는 이날 하루 사이 0.1%포인트 올라 0.5% 선을 웃돌았고, 장기물인 10년물 금리도 1.58% 선까지 오름세를 보였다.
금리 상승에 민감한 기술주 등 성장주를 중심으로 뉴욕 3대지수는 일제히 내림세로 거래를 마쳤다. 다우지수가 0.66% 내린 한편, 애플(-1.92%)과 아마존(-2.63%), 엔비디아(-3.91%) 등 대형 기술주가 포진한 나스닥도 1.66% 하락 마감했다. 한국 증시에서 코스피도 이날 장 중 1% 가까이 내려가며 인플레이션 충격 여진을 반영했다. 다만 지난달에 이어 이달 초 재차 3,000선을 내준 뒤 조정을 이어간 영향으로 낙폭을 제한해 0.18% 하락한 2,924.92에 장을 마쳤다. 위험 선호 심리가 위축되면서 이날 서울 외환시장에서 원·달러 환율은 5.1원 오른 1,186원으로 출발했지만, 오후 들어 하락폭을 키우며 0.1원 내린 1,180.8원에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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