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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턱이 낮은 글이 좋은 글이고, 문턱이 낮은 사회가 좋은 사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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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턱이 낮은 글이 좋은 글이고, 문턱이 낮은 사회가 좋은 사회다"

입력
2021.11.12 04:30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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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재 '번역의 모험'

2017년 2월 21일 오후 서울 세종대에서 '인간 VS 인공지능' 번역대결이 열린 가운데 인간 번역사들이 먼저 번역작업을 하고 있다. 홍인기 기자

2017년 2월 21일 오후 서울 세종대에서 '인간 VS 인공지능' 번역대결이 열린 가운데 인간 번역사들이 먼저 번역작업을 하고 있다. 홍인기 기자

2018년 한국고용정보원이 발간한 보고서 ‘4차 산업혁명시대의 신(新)직업’은 인공지능이 발달해 위험해진 대표적 직업 중 하나로 통·번역가를 꼽는다. 과학 논문이나 사건 보도 기사 등 해석의 폭이 좁은 글은 기계번역으로 대체하기 쉬워진 ‘자동번역’의 시대, 경력 30년의 베테랑 번역가는 “자기 직업의 존엄을 조금이라도 더 오래 지키는 길”은 “번역에 더 공을 들이는 길 말고는 없다”고 말한다.

이희재 번역가의 ‘번역의 모험’은 번역가들의 입문서이자 편집자를 비롯해 언어를 다루는 직업에 종사하는 많은 이들의 필독서로 꼽히는 책 ‘번역의 탄생’ 이후 저자가 12년 만에 내놓은 후속작이다.

전작에서 “(직역주의는) 원문을 우러러보는 종살이에 가깝다”고 통렬하게 꼬집으며 원문을 영어와 일본어에 물들지 않은 자연스러운 한국어로 옮기는 법을 다룬 저자는, 이번 책에서 한발 더 나아가 ‘(원어를) 문턱이 낮은 한국어로 옮기는 법’을 소개한다.

저자가 말하는 ‘문턱이 낮은 글’이란 무엇인가? “독자가 편히 ‘정주행’하도록 돕는 글’이다. 즉 “문장에 담긴 뜻이 금방 와닿지 않는 모호한 대목에서 독자가 읽기를 멈추거나 다시 뜻을 살피려고 ‘역주행’하지 않게끔” 하는 글이다. 이처럼 명료하면서도 간결한 우리말 문장을 짓는 데 요긴한 원칙을 저자는 ‘쉼표’ ‘모으기’ ‘찌르기’ ‘흘려보내기’ ‘맞추기’ ‘낮추기’ ‘살리기’ 등으로 나눠 설명한다.

30년간 번역 현장에 몸담았던 이희재 번역가는 오늘날 번역가의 일이 "언어의 징검다리를 놓는 것"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교양인 제공

30년간 번역 현장에 몸담았던 이희재 번역가는 오늘날 번역가의 일이 "언어의 징검다리를 놓는 것"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교양인 제공


이를 위해 저자가 택한 방법은 풍부한 예시를 드는 것, 그리고 언어의 기원을 찾아가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낮추기’ 장에서 “뜻을 전하기보다는 허세를 드러내려는 말”을 설명하기 위해 저자는 두 문장을 비교한다.

“포털은 뉴스 편성을 위해 우리 사회의 어젠다세팅에 나선다”

“포털은 뉴스 편성을 통해 우리 사회의 의제 설정에 나선다.”

‘agenda-setting’을 어째서 ‘어젠다세팅’이 아니라 ‘의제 설정’으로 옮겨 써야 하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저자는 1623년 옥스퍼드 영어 사전을 들춘다. 라틴어 'agenda'가 원어인 영어 'agenda'는 1623년 처음 쓰인 용례에서는 ‘해야 할 일’ ‘과업’ ‘과제’ 등으로 쓰였다. 그러다 1800년 초반부터 ‘회의에서 정식으로 논의할 사항들’, 즉 ‘의제’라는 뜻으로 쓰이게 된다.

반면 동아시아 한자권에서 오래 전부터 쓰이던 議題(의제)는 본래 ‘시문 등의 주제를 논의해서 정한다’는 뜻의 동사였다. 議題가 agenda에 대응해 ‘회의 주제’라는 뜻의 명사로 사용된 것은 19세기 후반 막부 말기 일본의 번역가인 니시 아마네에 의해서다. 그가 도쿠가와 막부의 마지막 쇼군이었던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지시를 받고 ‘議題草案(의제초안)’이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만들면서 의제는 agenda에 대응하는 명사가 됐다.

뛰어난 조어력과 압축력을 지닌 한자에서 출발한 일본어는 서양 문물을 빠르게 받아들이는 데 수월했고, 서양 문물을 번역한 일본 글의 문턱을 낮췄다. 마찬가지로 한자를 경유하는 한국어 역시 ‘agenda’를 ‘의제’로 받아들이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이 같은 다른 언어 간 탄력적인 수용과 적응의 역사를 모두 뒤로한 채, ‘agenda-setting’을 ‘어젠다세팅’이라고 옮겨 적는 요즈음의 번역을 저자는 “외국어 지식을 드러내려는 허세”라고 비판한다.

번역의 모험. 이희재 지음. 교양인 발행. 302쪽. 1만6,800원

번역의 모험. 이희재 지음. 교양인 발행. 302쪽. 1만6,800원


이외에도 종속절이 앞에 오는 영문을 쉼표까지 그대로 살리는 번역 탓에 한국어로 글을 쓸 때도 기계적으로 쉼표를 찍는 습관을 꼬집고, 원칙 없는 띄어쓰기가 오히려 글쓰기의 문턱을 높인다고 말한다. “글의 힘은 허세와 권위에서 나오지 않는다”고 믿는 저자는 잘못된 사이시옷과 띄어쓰기를 지적하면서 어설픈 맞춤법 원칙을 들이대는 사람들은 오히려 글을 소통의 수단이 아닌 배제의 수단으로 삼으며 ‘문자 권력’을 휘둘렀던 조선 기득권층과 다를 바 없다고 비판한다.

그리하여 “번역가는 언어의 징검다리를 놓는” 사람이며 “현실의 말을 제대로 담아내는” 일이 번역의 앞날이 되어야 한다고 결론 내린다. 이 같은 저자의 일침은 단순히 번역의 영역뿐 아니라 오독과 비약, 배제와 편가르기가 판치는 오늘날의 모든 말과 글의 세계에 적용되는 가르침이다. “조금씩이라도 나은 문장을 만들기 위해 정진하는 것” 그리하여 “문턱이 낮은 글”로 “문턱이 낮은 사회”를 만드는 것. 글과 말에 빚진 모두가 유념해야 할 제1의 원칙일 것이다.

한소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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