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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이어 딸도 같은 난치병 진단... 어머니 심정은 오죽했을까

입력
2021.11.23 17:00
수정
2021.11.23 17:45
2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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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윤혁 내과 전문의

편집자주

의료계 종사자라면 평생 잊지 못할 환자에 대한 기억 하나쯤은 갖고 있을 것이다. 자신이 생명을 구한 환자일 수도 있고, 반대로 자신에게 각별한 의미를 일깨워준 환자일 수도 있다. 아픈 사람, 아픈 사연과 매일 마주하는 의료종사자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들어보자.

추운 어느 겨울날, 여느 때처럼 자문받은 환자들의 차트를 컴퓨터로 하나씩 열어보며 회신을 하고 있었다. 수개월 전부터 복통과 혈변이 반복되던 젊은 여성, 최근 급격히 악화되어 응급실 방문. 궤양성 대장염을 의심할 수 있는 전형적인 사례다. 치료를 하려면 확진이 필요하니 우선 대장내시경을 하겠다고 답변을 달았다.

내시경실에서 마주한 그의 상태는 생각보다 심각했다. 겉보기에도 수척하고 얼굴은 창백했다. 배를 눌러보자 괴로운 소리를 냈다. 내시경을 해 보니 장 점막 전체가 마치 화염에 휩싸인 것처럼 붉게 부어 있었고 깊은 고랑의 궤양들 사이로 피고름이 가득했다. 역시 전형적인 궤양성 대장염의 급성 악화로 보였다.

이후 병동에서 회진을 돌며 응급실에서 올라온 그녀를 다시 만났다.

“병명은 궤양성 대장염 같아요. 대장에 염증이 발생해 혈변과 설사, 복통을 유발하는 만성 면역성 질환입니다. 많이 놀라셨겠지만 일단 대장에 발생한 불을 끄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나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상황이라, 늘 하는 설명을 환자에게 늘어놓았다. 지금은 상황이 좋지 않지만 꼭 잘 치료해서 무사히 퇴원하도록 하겠다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그의 얼굴에는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다. 좁은 2인실 병상 커튼 뒤로 함께 보였던 환자 어머니 얼굴에는 절망에 가까운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안절부절못하며 소심하게 제발 잘 부탁한다던 어머니의 얼굴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런데 어디선가 본 얼굴인데… 뭐라고 운을 떼야 할지 몰라 망설이던 순간, 환자의 어머니가 나를 먼저 알아보았다.

“선생님, 저 김상수(가명) 엄마예요. 상수 수술할 때 선생님도 함께 계셨는데 기억하세요?”

그제야 기억이 났다. 이제 10년이 다 되어가는 임상강사 시절, 은사님 앞으로 입원했던 한 청년의 어머니였다. 그는 어릴 적부터 궤양성 대장염으로 투병하다 약이 듣지 않아 결국 대장과 직장을 모두 절제하고 소장으로 인공직장을 만드는 큰 수술을 했던 환자다. 당시 은사님은 나를 불러 김상수 환자는 수술을 해야 하겠으니 환자와 정상인의 대장내시경 사진을 준비해 달라고 하셨다. 이후 은사님은 환자와 어머니를 불러 두 사진을 비교해 보여주며 수술이 필요한 이유를 아주 길게 설명하셨다. 나로서는 무척 인상 깊은 장면이었다. 아무튼 그는 수술 후에도 합병증이 발생해 한참을 더 고생하다 퇴원하였다. 이후 나는 발령을 받았고 그 환자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아들이 궤양성 대장염으로 오랫동안 고생하다 결국 전대장절제술을 받았는데 남은 딸까지 같은 병이라는 선고를 내가 했으니 어머니로서 심정이 오죽했을까? 이 환자도 남동생이 지병으로 고생하는 것을 지켜봤을 텐데 본인이 같은 질환이라니 얼마나 충격이 클까? 나는 다시 한번 정말 최선을 다해 치료하겠다고 말씀드렸고 그건 스스로에 대한 다짐이었다.

하지만 스테로이드 투여 1주일이 지나도 병세에 차도가 없었다. 하루에 스무 번도 넘게 화장실을 들락거리며 혈변을 보고 복통과 발열이 지속되었다. 어쩔 수 없이 다음 치료인 생물학제제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외과 교수님께 수술을 할 수도 있는 환자라고 미리 의뢰를 드렸다. 급성 중증 궤양성 대장염은 약물 치료 시작 후 1~2주 뒤에도 효과가 없으면 수술을 고려해야 한다. 환자에게는 최대한 희망을 주면서도 최악의 경우를 항상 대비해야 하는 것이 의사의 숙명이다.

그런데 외과 교수님이 다녀간 후 병실은 울음바다가 되었다.

“선생님, 제발 수술만은 하고 싶지 않아요.”

“네, 지금 당장 수술을 하자는 것이 아니라, 약이 듣지 않으면 수술을 해야 할 수도 있으니 미리 외과 교수님께 알려드린 겁니다. 좀 더 기다려 봅시다.”

다시 1주일이 지났다. 병세는 여전히 차도가 없어 보였다. 고민이 깊어졌다.

“아무래도 수술을 고려해야 할 것 같아요. 더 기다리면 영양상태도 더 나빠지고 점점 불리해집니다.”

“선생님, 조금씩 나아지는 것 같아요. 믿어주세요. 수술은 정말 싫어요.”

“저는 내과 의사입니다. 약물로 잘 치료해서 수술을 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임무인데 왜 수술을 좋아하겠어요? 하지만 장을 살리려다 목숨을 잃을 수도 있어요.”

난 애원하는 그를 남겨두고 연구실로 돌아왔다. 그리곤 다시 컴퓨터 모니터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체온, 혈변, 혈액 검사 등 숫자로 환산 가능한 지표와 환자의 주관적인 느낌. 어느 것이 진실일까, 이리 보고 저리 보고 혹시 놓친 것은 없는지, 다른 방법은 없을지 또 생각해 본다. 문헌을 뒤져본다. 결국 그녀는 고가의 생물학제제를 비보험으로 한 번 더 투여받았다. 이후 활활 타오르던 불길이 서서히 잡히기 시작했다. 아마 한 달을 그렇게 입원했던 것 같다.

다시 몇 개월이 지났다. 기다리던 봄이 왔고 그에게도 따스한 햇살이 비치기 시작했다. 체중이 회복되고 탈모와 생리불순도 모두 정상화되었다. 외래 진료실에서 그가 자랑스레 말했다.

“선생님, 저 이제 직장에 복귀하기로 했어요.”

“정말 잘되었네요. 보기 좋아요. 축하합니다!”

“그동안 선생님 말씀도 잘 안 듣고 속을 많이 썩였죠? 죄송해요.”

“아닙니다.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워낙 심했기 때문에 방심은 금물이에요. 앞으로도 계속 잘 치료받으세요.”

“선생님, 정말 감사드려요.”

뒤에서 어머니가 수줍게 웃으며 말했다.

인연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우연일까. 사는 곳도 멀리 떨어져 있는데, 우리 병원 응급실을 방문해 모녀가 나와 다시 만나다니, 신기할 뿐이었다. 이후 나는 해외연수를 떠났고 그를 연고지 병원으로 회송했다. 지금도 그 모녀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다. 재발 없이 잘 지내고 있기를 바랄 뿐이다

분당서울대병원 소화기내과 부교수

분당서울대병원 소화기내과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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