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김솔 '유럽식 독서법'
편집자주
※ 한국 문학의 가장 첨단의 감수성에 수여해온 한국일보문학상이 54번째 주인공 찾기에 나섭니다.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오른 작품은 10편. 심사위원들이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 본심에 오른 작품을 2편씩 소개합니다(작가 이름 가나다순). 수상작은 본심을 거쳐 이달 하순 발표합니다.
'유럽식 독서법'은 유럽과 책과 독서에 관한 이야기인가. 그렇다. 유럽 8개 나라가 배경인 단편소설집이고 역사, 지리, 철학, 과학에 관한 지식이 수없이 등장한다. 또한 독서법이란 인생을 읽는 법의 은유일 테고, 당연히 인간에 대한 집요한 사유가 이 책의 내용이다.
하지만 이 생각은 조금 틀려 있다. 이 소설들은 유럽이 아니라 ‘이곳’의 이야기이다. 국적, 인종, 계급으로 환유되는 삶의 부조리는 무국적이기 때문이다. 지적인 정보값? 그건 없다고 할 수 있다. 이 소설은 계몽을 혐오하며, 이 낯설고 기묘한 이야기의 세계가 단지 공유되기만을 원한다. 소설 속에 작가가 직접 나타나 이렇게 독법의 힌트를 준다. '이 소설을 타고 질주하는 동안 차창 밖 풍경을 기억하려 하거나 인과를 해독해내려 애쓰지 말고 그저 자신의 내부에 잠시 드러나는 인상과 감정에만 집중할 것을 권장한다.’
그렇다면 독자는 유럽 각지의 불법 이민자, 망상가, 정부, 범죄자들의 이야기를 아무런 윤리적·사회적 필터 없이 자연스럽게 빠져들어 듣기만 하면 되는 것인가. 하지만 먼저 읽은 사람으로서 경고하건대, 독자를 태운 이 소설이라는 차량은 아주 험난한 비포장도로를 가게 된다.
먼저 언어라는 시끄러운 자갈에 부딪혀야 한다. 이 소설의 문장은 고통스러울 만큼 정밀하며 우아하다. 훈련된 안목이 없이는 도무지 알아볼 수가 없다. ‘시니컬한 하드보일드’ 소설이었다가 갑자기 난해한 종교적 경전이 되기도 한다.
언어의 자갈길을 지나면 망상과 몽상의 현란한 파열을 겪어야 한다. ‘브라운 운동을 통해 시간이 미래에서 과거로 곧장 건너갔다가 현재에 튕겨졌다면, 그리스도와 함께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에 못 박혔다가 구사일생으로 도망친 두 명의 죄수들이 그 범선을 번갈아 끌고 밀면서 알프스 산맥을 넘었을 수도 있다.’ 이런 문장은 한 평자가 표현한 대로 그야말로 ‘유쾌한 허풍의 맛과 모든 게 용납되는 소설적 세계의 난장’이다.
그뿐인가. 이 차를 탄 뒤 가장 엉덩이를 아프게 하는 것은 해박한 지식의 파편들이다. 온 세계의 텍스트들이라는 바위가 사방으로 튀어오른다. 이쯤에서 그만 차에서 내리려는 독자들에게 작가는 협박과 독려를 동시에 보낸다. ‘당신의 인내심이 이 소설의 연료이다.’
이런 험난한 여정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이 차에 올라타는 것일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존엄한 인간이라는 확신 없이 가구나 시체가 된 뒤에도 여전히 살아 있다고 믿게 될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신이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는 세상은 당신이 등지고 있는 그곳과 전혀 다르지 않을 테니까.’ 대단히 위협적이며 매력적인 소설이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