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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와 충돌하는 87년 체제

입력
2021.11.05 18:00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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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세대 지났어도 6공화국 체제 그대로
사회상 변화 반영할 헌법질서 마련하고
대선 후보들 개헌 방향ㆍ입장 선언해야

편집자주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 선보이는 칼럼 '메아리'는 <한국일보> 논설위원과 편집국 데스크들의 울림 큰 생각을 담았습니다.

직선제 개헌을 포함한 '시국수습대책 8개항'을 발표하고 있는 노태우 민정당 총재. 한국일보 자료사진

직선제 개헌을 포함한 '시국수습대책 8개항'을 발표하고 있는 노태우 민정당 총재. 한국일보 자료사진

87년 민주화 흐름은 9차 개헌으로 결실을 맺었다.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한 개헌안은 군사정권과 문민정부의 가교역할을 했다. 헌법에 국군의 정치적 중립을 명시함으로써 군사독재에 올가미를 씌웠고 구속적부심을 포함한 신체적 자유를 기본권에 폭넓게 반영했다. 국정감사를 부활하고 헌법재판소를 설치하는 등 현재의 헌법 질서가 모두 87년 체제에서 마련됐으며 이듬해 노태우 정부의 6공화국이 출범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의 별세 소식이 뜨자마자 불현듯 우리가 아직 그와 그 시대의 유산 속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87년 체제의 당사자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우리는 33년째 6공화국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사이 국민총생산(GDP)이 약 1,900조 원으로 15배나 성장하고, 3만 달러로 10배가량 증가한 1인당 GDP는 선진국 반열에 올랐다. 경제는 물론 생활환경 자체가 급변했는데도 사회적 규범은 한 세대 전 그대로다. 인공지능(AI) 시대가 386컴퓨터 인프라에 의존하는 기형적 구조가 아닐 수 없다.

낡은 체제는 시대와 충돌하기 마련이다. 공판중심주의에다 국민참여재판이 도입된 사법부를 ‘닫힌 사법’ 시스템으로 통제하다가 끝내 ‘사법농단’ 사태를 야기한 게 단적인 예다. 공수처가 출범하고 검찰 수사권 대부분이 경찰로 넘어간 상황도 검찰 중심의 수사ㆍ사법체계 전반과 상충한다. 중앙집권형 행정부 조직은 완전한 지방자치의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공무원 노조가 등장하고 세월호 사태 이후 안전에 대한 요구가 분출하는 등 국민 기본권을 보강할 필요성도 생겼다.

무엇보다 현실과 정치체제의 괴리가 크다. 36세의 젊은 정치인이 제1야당 대표로 등장한 마당에 대통령 출마 자격은 아직도 40세 이상으로 제한돼 있다. 나이로 피선거권을 제한하는 것은 분명 시대착오적이다. 하지만 헌법상 규정이라 개헌이 아니면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 같은 30대 정치인의 대권 도전은 상상도 할 수 없다.

권력구조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87년 체제는 민주화 열망과 함께 5년 단임 대통령 직선제를 선택했지만 30여 년 현실정치가 취지를 왜곡시킨 탓이다. 승자독식의 집권 기회를 잡기 위해 세력 간 이해집산이 횡행했고 진영 간 대결은 극으로 달렸다. 어떤 정부도 말기에는 정권교체 요구를 비켜가지 못하면서 전임 정부는 극복 내지 보복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책임 정치는 실종됐고 퇴임 대통령의 불행은 반복됐다. 군사독재에 맞서 직선제를 쟁취했다는 87년의 성취감은 제왕적 대통령의 등장으로 송두리째 날아가고 말았다.

낡은 체제가 사회 구석구석을 짓누르고 있다면 바꿔야 마땅하다. 문재인 대통령이 집권 이듬해 개헌안을 발의한 것도 87년 체제가 수명을 다했다는 판단 때문이다. “30년이 지난 헌법으로는 국민의 뜻을 따라갈 수 없다”는 게 개헌안 발의 이유였다. 특히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장기적 국가과제를 일관성과 연속성을 갖고 추진하기 위해 대통령 4년 연임제를 채택할 때가 되었다”며 권력구조 개편에 드라이브를 걸었다. 하지만 보수 야당의 반발에 막혀 국회 통과는 좌절되고 말았다.

개헌 필요성은 누구나 공감하고 있다. 여론은 66%, 헌법 전문가는 76%, 국회의원은 무려 93%가 개헌에 찬성한다는 조사 결과가 지난 제헌절 즈음에 쏟아졌다. 박병석 국회의장은 제헌절 기념사에서 “내년 대선 일정이 있다고 해서 개헌 추진을 미룰 수 없다”며 여야 정치 지도자들에게 개헌 추진을 촉구했다. 양강 체제를 구축한 민주당과 국민의힘 대선 후보 모두 시대적 요구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

김정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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