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스토옙스키 탄생 200주년 맞이 기념 도서들
“내가 궁극적으로 인류를 행복하게 만들고 평화와 안정을 가져다 줄 목적으로 인류의 운명의 건물을 건설한다면, 그러나 그 일을 위해서 단 하나의 미약한 창조물이라도, 아까 조그만 주먹으로 자기 가슴을 치던 불쌍한 계집애라도 괴롭히는 것이 불가피한 일이므로 그 애의 보상받을 수 없는 눈물을 토대로 그 건물을 세우게 된다면, 그런 조건 아래에서 건축가가 되는 것에 동의할 수 있겠니? 자, 어디 솔직히 대답해봐”
“아니, 동의할 수 없을 거예요.”
“네가 건설한 건물 속에 사는 사람들이 어린 희생자의 보상받을 길 없는 피 위에 세워진 행복을 받아들이는 데 동의하고 결국 받아들여서 영원히 행복해진다면, 넌 그런 이념을 용납할 수 있겠니?”
“아니오, 용납할 수 없어요.”
도스토옙스키의 장편소설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제2부 제5권에 등장하는 이반과 알료샤의 이 대화는 소설 전체를 통틀어 가장 유명한 대목 중 하나다. ‘한 사람의 고통과 여러 명의 행복 중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하는가’ ‘특히 이 한 사람이 아무 죄도 없는 어린아이라면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딜레마를 통해, 작가는 고통과 행복에 관한 가장 본질적인 질문을 던진다. 그 스스로 빈곤과 질병을 비롯한 숱한 고통 속에서 살았던 도스토옙스키는 고통을 실존의 제1조건으로 간주했다. 때문에 ‘고통’은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뿐만 아니라 도스토옙스키 문학 전체를 통틀어 핵심 화두 중 하나로 꼽힌다.
석영중 고려대 노어노문학과 교수의 ‘도스토옙스키의 명장면 200’은 이처럼 러시아가 낳은 세계적 대문호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주요 걸작들에서 200개의 장면만을 추려내 각 장면마다 저자의 짤막한 해설을 덧붙인 책이다. 11월 11일 도스토옙스키 탄생 200주년을 맞아 기획됐다. 위대한 소설의 특정 대목만을 꼽아 갈무리하는 것은 자칫 위험한 독서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러시아문학회장과 한국슬라브학회장을 역임한 저자의 촘촘한 해설 덕분에 단순한 다이제스트가 아닌 ‘도스토옙스키 톺아보기’로서 역할을 해낸다.
‘죄와 벌’, ‘백치’, ‘악령’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등 4대 장편뿐만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 ‘죽음의 집의 기록’, ‘분식', ‘노름꾼’, ‘미성년’ 등의 대표작을 ‘불안, 고립, 권태, 권력, 고통, 모순, 읽고 쓰기, 아름다움, 삶, 사랑, 용서, 기쁨’이라는 12개 키워드로 나눠 분류했다. 덕분에 도스토옙스키 작품을 한 권도 읽어보지 못한 독자도, 전문가의 해석이 궁금했던 독자도 만족할 만한 책으로 완성됐다.
‘도스토옙스키 명장면 200’이 도스토옙스키라는 세계 앞에서 망설이고 있는 독자를 친절하게 이끄는 안내서에 가깝다면, 함께 출간된 같은 저자의 ‘도스토옙스키 깊이 읽기’는 제목 그대로 도스토옙스키 문학 세계로 한층 더 깊이 들어가는 작업이다. 특히 독실한 그리스도교 신앙인이었고 생애 후반까지도 최신 자연과학 서적을 탐독했던 작가의 관심사에 초점을 둬 ‘종교’와 ‘과학’이라는 두 개의 코드를 중심으로 도스토옙스키의 문학 세계를 조명한다. 교부 철학에서 7가지 대죄 중 하나인 ‘어시디아’의 개념을 통해 ‘악령’을 해석하고, ‘지하로부터의 수기’에 등장하는 자유 의지 논쟁을 현대 신경과학자와의 논쟁으로 읽는 등 도스토옙스키 문학에 대한 참신한 접근을 만나 볼 수 있다.
물론, 아무리 안내서가 훌륭하다 한들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을 직접 읽는 경험에는 미치지 못할 것이다. 2000년 최초로 한국어판 도스토옙스키 전집을 발행, 20년간 총 550쇄를 거듭하며 한국에 도스토옙스키를 알리는 데 기여해온 열린책들은 탄생 20주년을 맞아 새로운 전집을 내놓았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경음과 구개음화로 대표되는, 발음 충실성 위주의 전통적 러시아어 표기 원칙을 포기하고 국립국어원 표준 표기에 따라 본문의 모든 인명과 지명이 수정됐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도스또예프스끼는 도스토옙스키로, 뻬쩨르부르그는 페테르부르크 등으로 바뀌었다. 이 외에도 여성이 남성에게 일방적으로 존대하게 한 번역 관례를 탈피하는 등 변화한 시대상을 충분히 반영했다. 덕분에 탄생 200주년이 지났지만 도스토옙스키는 여전히 ‘현대적인 작가’로 오늘날 독자와 함께 숨쉴 수 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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