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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루트 총격 사건, 내전의 전초전인가

입력
2021.11.06 05:30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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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베이루트 폭발 대참사 이후에도
3개 정파 간 균열 여전…경제는 더 악화
'약한 국가' 레바논 내 폭력 위험만 증폭
"내전으로 가진 않을 것" 전망, 아직 우세

지난달 15일 이슬람 시아파 무장정파 헤즈볼라가 연루된 총격전이 발생했던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의 사건 현장. 거리 곳곳에 널려 있는 건물 유리창 파편들이 당시 격렬했던 교전 상황을 짐작하도록 해 주고 있다. 베이루트=EPA 연합뉴스

지난달 15일 이슬람 시아파 무장정파 헤즈볼라가 연루된 총격전이 발생했던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의 사건 현장. 거리 곳곳에 널려 있는 건물 유리창 파편들이 당시 격렬했던 교전 상황을 짐작하도록 해 주고 있다. 베이루트=EPA 연합뉴스

지난달 14일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에서 총격전이 벌어졌다. 레바논 적십자사에 따르면, 7명이 사망하고 32명이 다쳤다. 단순한 사건이 아니었다. 이슬람 시아파 무장정파인 헤즈볼라와 그 동맹세력인 아말이 레바논 주법원 빌딩인 사법궁전 앞에서 집회를 하던 중, 시위대를 겨냥한 총격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헤즈볼라 대원들이 소총과 수류탄 투척기 등을 동원해 반격하면서 총격전은 몇 시간 동안 이어졌다. 최근 10년 사이에 벌어졌던 '최악의 시가전'이었다.

3개 종교 세력(기독교 마론파-이슬람 수니파-이슬람 시아파)의 권력 분점 형태로 정치 체제를 구성한 레바논은 '중동의 화약고'로 불릴 만큼 정파 간 갈등이 심각하다. 1932년 '대통령은 기독교파, 국무총리는 이슬람 수니파, 국회의장은 이슬람 시아파가 담당한다'는 국민협약이 맺어지면서 이른바 '모자이크 국가'가 된 이후, 줄곧 아슬아슬한 동거를 이어 왔다. 이번 총격 사건은 이러한 레바논에서 내전을 촉발하는 방아쇠 역할을 할 수 있는 탓에 전 세계의 관심이 쏠리기도 했다.

지난달 16일 레바논 베이루트에서 이슬람 시아파 무장정파 헤즈볼라 지지자들이 전날 총격 사건으로 숨진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집회를 열고 있다. 베이루트=AFP 연합뉴스

지난달 16일 레바논 베이루트에서 이슬람 시아파 무장정파 헤즈볼라 지지자들이 전날 총격 사건으로 숨진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집회를 열고 있다. 베이루트=AFP 연합뉴스


베이루트 대폭발로 거슬러 올라가는 총격전의 배경

문제의 총격전이 발생한 맥락을 이해하려면, 작년 8월 4일 베이루트항에서 일어난 대폭발 참사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질산암모늄 대폭발로 200명이 사망하고 7,000여 명이 부상한 대참사에 대한 수사를 둘러싼 정파 간 갈등이 지난달 14일 시위의 발단이었던 탓이다. 고위 판사를 중심으로 구성된 조사단과 관련, 헤즈볼라와 아말은 올해 2월 임명된 두 번째 조사 책임자인 판사의 교체를 요구하며 시위에 나섰다. 헤즈볼라는 조사 책임자가 정치적이라고 주장하지만, 대참사에 대한 조사 자체가 크게 보면 수십 년 동안 레바논의 지배 엘리트한테 주어진 특권, 즉 '권력 공유 시스템에 대한 도전'이라는 공격을 받고 있는 상황이다. 이번 총격전이 시아파의 자작극인지, 반대 정파(기독교)가 배후에 있는지 등은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결국은 ‘정체성이 다른 정파 간 정치 투쟁의 산물’로 해석할 수 있다.

사회·정치는 물론, 경제적 위기도 레바논 내부 폭력 발생 위험을 높이는 데 한몫했다. 지난 3월 레바논 유력 신문 '안나하르'의 보도를 보면 레바논인의 55%는 빈곤선 이하(2020년 기준)이고, 이 가운데 23%는 극빈층에 속한다. 실업률은 거의 40%에 육박하며, 공공부채는 국내총생산(GDP)의 171%에 달한다. 지난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을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국가 의료 시스템도 붕괴 직전에 놓였다. 올해 경제는 더욱 악화됐다. 국가의 식량, 석유 보유량이 급감하면서 정부는 식량 보조금을 줄이고 휘발유 가격을 인상할 것이라고 발표하기도 했다. 갑작스런 대규모 난민 유입도 사회·경제적 혼란을 야기했다. 2011년 아랍의 봄 이후 대규모 시리아 난민이 생겼는데, 올해 초 통계에 따르면 비공식적으로 150만 명(공식 90만 명)의 시리아 난민이 레바논에 거주하고 있다. 150만 명은 레바논 전체 인구의 25%다. 전 세계에서 인구 대비 가장 높은 난민 비율이다.

지난달 26일 레바논 베이루트의 한 상점 테이블 위에 레바논 지폐 다발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베이루트=로이터 연합뉴스

지난달 26일 레바논 베이루트의 한 상점 테이블 위에 레바논 지폐 다발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베이루트=로이터 연합뉴스


정치권 자체가 혼란의 주범…'약한 국가' 속 폭력 위험

정치권 자체도 혼란의 주범이다. 지난해 8월 베이루트항 사고 책임으로 하산 디아브 총리가 사임했으나, 헤즈볼라의 강력한 기독교 동맹 세력으로 알려진 미셸 아운 대통령은 13개월 만인 올해 9월에야 나지브 미카티를 총리로 임명했다. 사고 수습과 경제 회복이 시급한 상황임에도 헤즈볼라 동맹 세력인 기독교계 대통령과 이슬람 수니파계 간 정치적 이해 충돌 때문에 신임 총리 임명이 1년 이상 지연된 것이다.

새 총리가 탄생했지만 여전히 '약한 국가'로 불리는 레바논 정부에 혼란 통제 역할 수행을 기대하긴 어려워 보인다. 헤즈볼라는 제도권 안에 들어왔으나, 일종의 '국가 내 국가'다. 수니파의 입지는 계속 약화되고 있다. 종교·종파 간 화학적 결합, 즉 완전한 국민국가 건설이 힘들다는 의미다. 따라서 수니파계 미카티 정부가 현 레바논 난국을 극복하기도 쉽지 않다.

이런 혼란들이 쌓이고 쌓인 탓에 레바논 내에선 이미 지난달 총격전 이전부터 '폭력 발생 위험'이 증폭되고 있었다. 충돌의 진앙지인 타유네 지역 사법궁전은 1975~1990년 레바논 내전 발발지와 가까운 곳으로, '혼란의 망령'을 또다시 불러일으키는 곳이 됐다. 헤즈볼라와 아말은 기독교계 정당인 '크리스천 레바논 포스'(CLF)를 배후로 지목하고, "그들이 내전을 도모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듯한 입장도 취했다. 레바논 정규군 8만5,000명보다도 헤즈볼라 병력이 더 많다는 과시였다. '우리가 내전을 원하진 않지만, 내전이 발생하면 승리할 것'이라는 의지를 담은 메시지를 내놓은 것이다. 물론 CLF는 이를 부인했으나, 양측의 갈등이 얼마나 심화하고 있는지 보여 주는 대목이다.

레바논 베이루트항 대폭발 참사 1년 후인 올해 8월 4일, 정확한 사고 원인 조사 및 책임자 처벌을 촉구하는 의미로 '정의를 위한 행동' 문구를 새긴 의사봉 모양의 기념물이 사건 현장에 설치돼 있다. 베이루트=AP 연합뉴스

레바논 베이루트항 대폭발 참사 1년 후인 올해 8월 4일, 정확한 사고 원인 조사 및 책임자 처벌을 촉구하는 의미로 '정의를 위한 행동' 문구를 새긴 의사봉 모양의 기념물이 사건 현장에 설치돼 있다. 베이루트=AP 연합뉴스


내전 확대 가능성은…"비교적 안정적"

이번 총격 사건이 세계적 관심사로 부각된 이유는 △기독교 마론파와 무슬림 간 15년 내전(1975~1990년) △시리아 내전 중 발생한 대규모 시리아 난민의 레바논 이주 △2019년 이후 시아파 벨트 내 불안정성 확산 △사회경제적 혼란과 피폐 등에 대한 기억 때문이다. 모든 분쟁은 여러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발생한다. 변혁, 위기, 곤경, 빈곤의 시기에는 불안이 증가하고 경계, 즉 정체성이 중요해진다. 이때 적, 희생양을 찾으려는 욕구가 생겨나고, 이는 '낯선 자'를 향하게 된다.

적이란 무서운 위협이지만, 혼란과 불신, 불확실성이 고조되는 시기에는 그만큼 그리운 대상이 된다. 특히 '불안정의 이익'을 추구하는 세력에 적은 필수품이고, 결국 집단 이데올로기로 이어진다.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는 건 정치화한 종교다. 지금 레바논은 바로 이 같은 위험에 빠져들고 있다. 레바논에는 각 종파의 종교 지도자, 정치 인사, 자본가, 상인 간에 끈끈한 후견 네트워크가 형성돼 있어 쉽게 내전으로 확대될 수 있는 여건도 조성돼 있다. 과거 15년 내전도 이러한 환경에서 발생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총격 사건 이후 아직까지는 비교적 안정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헤즈볼라와 정부군 모두 내전으로의 확대 가능성은 경계하는 모습이다. 레바논에서 오랫동안 연구했던 이경수 한국외대 교수는 "베이루트 항구 폭발 사고 조사가 어떤 방향으로 갈지 좀 더 지켜봐야 하지만, 내전으로 가지는 않을 것 같다"고 분석했다. 어쩌면 올해 총격 사건 이후 각 정파가 폭력 사용을 자제하는 것은 바로 과거 15년 내전에 대한 집단기억으로부터 배운 교훈 덕분으로 볼 수 있다. 모자이크 사회는 자그마한 충격에도 깨지기 쉬운 유리에 불과하나, 잘 조화되면 아름다운 예술 작품이 된다. 레바논 사회도 위기를 극복하고 후자가 될 수 있길 바란다.

정상률 명지대 중동문제연구소 HK교수

정상률 명지대 중동문제연구소 HK교수


정상률 명지대 중동문제연구소 HK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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