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겸 노동당 총비서는 지난달 국방발전전람회 기념연설에서 “남조선(남한)과 미국은 ‘주적’이 아니다”라는 깜짝 발언을 내놨다. 곧 이어 국가정보원의 국회 보고를 통해 북한이 내부적으로 ‘김정은주의’를 정립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일련의 흐름을 볼 때 김 위원장이 군이 펄쩍 뛸 만한 주적 부정 발언을 주저 없이 한 것은 집권 10년 동안 지속적인 군부 힘빼기를 통해 국정을 완전히 장악했다는 자신감이 반영됐다는 분석이다. 아버지 김정일 시대 ‘선군(先軍)정치’와의 결별을 김정은주의의 출발점으로 내세울 가능성이 커진 셈이다.
고재홍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책임연구원은 3일 공개한 ‘북한 주적개념 변화 배경과 전망’ 보고서에서 “한미를 주적으로 보지 않겠다는 김 위원장의 발언은 약화된 북한군의 위상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풀이했다. 지난 10년간 군부의 힘이 쪼그라들지 않았다면 주적 개념에도 변화를 주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점이 근거다.
바꿔 말하면 2011년 김 위원장 집권 후 군부의 과도한 권한을 각료들에게 분산시키고, 노동당을 통치 전면에 세우는 김정은식 ‘시스템 통치’가 안착했다는 의미도 된다. 힘의 균형추가 당쪽으로 기울면서 자연스레 최고지도자의 정책 결정권이 확대됐고, 최대 당면 위협인 한미를 다루는 개념까지 바꿀 수 있는 수준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김 위원장의 과감한 발언 배경엔 김정은주의 체계 정립에 골몰하는 북한 당국의 노력이 자리 잡고 있다. 그는 선대의 선군정치 그늘에서 벗어나 최고지도자를 중심으로 당과 군, 인민의 단결을 촉구하는 김정은주의를 지속적으로 설파하고 있다. 노동신문은 이날 자 사설에서도 “우리의 일심단결은 김정은 동지에 대한 절대적 신뢰에 기초한 충성심의 결정체”라며 “총비서 동지의 유일적 영도체계를 더욱 철저히 확립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주적 부정 발언을 해도 군부가 저항할 수 없게끔 김정은주의가 지도 이념으로 급부상했다고 볼 수 있다.
김정은주의 선전 작업이 본궤도에 오르면서 김 위원장의 독자 행보도 더욱 빨라질 것으로 전망된다. 특히 김정은주의 확립은 군부의 입김을 계속 약화시켜 주요 정책 추진도 김 위원장의 의중에 따라 결정될 가능성이 크다.
징후는 벌써 나타나고 있다. 비군사영역인 경제 부문에서 당과 군, 국가보위성 등 특수기관들이 이득을 챙기는 ‘단위특수화’를 배격해 기득권의 이윤 독식을 막은 게 대표적이다. 김 위원장은 올해 2월 당 전원회의에서 단위특수화를 "당권, 법권, 군권을 발동해 단호히 처갈겨야 한다”고 역설했다. 고 책임연구원은 “김 위원장이 최근 대내 경제정책 역량 강화에 힘을 쏟는 것은 변화된 당군관계에 따라 최고지도자의 관심을 군부보다 비군사 부문에 두고 있다는 의미”라고 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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