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허명현 클래식 평론가가 한국일보 객원기자로 활동합니다. 경기아트센터에서 근무 중인 그는 공연계 최전선에서 심층 클래식 뉴스를 전할 예정입니다. 오페라에서 가수가 대사를 노래하듯 풀어내는 '레치타티보'처럼, 율동감 넘치는 기사가 독자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앙코르. 프랑스어로 연주자의 연주에 감탄하여 박수 등으로 다시 한번 연주를 요청하는 것을 뜻한다. 클래식 공연장에서는 본 공연이 끝난 뒤 흔히 있는 일이다. 관객들의 성원에 힘입어 연주자는 무대에 나와 다시 한번 연주를 한다. 어떤 작품이 연주될지는 당사자만이 알고 있다. 관객들은 전혀 예상할 수 없다. 그저 얼른 음악이 연주되기만을 기다릴 뿐이다. 앙코르의 매력이다.
깜짝 선물 같은 앙코르까지 모두 마치면 관객들은 자리에서 일어선다. 앙코르가 마지막 접시인 셈이다. 그래서 앙코르는 디저트다. 디저트는 프랑스어로 '식사를 끝마치다'라는 단어에서 유래했다. 짧고 강렬한 입가심이다. 과일이나 아이스크림 등 달콤한 음식이 주를 이룬다. 때로는 입가심 이상을 해내기도 한다. 아주 잘 선택된 디저트는 앞선 정식의 경험을 상기시킨다. 성공적인 디저트다.
앙코르도 마찬가지다. 연주회는 하나의 긴 코스 요리다. 연주자는 관객들을 위해 2시간짜리 정성스런 코스를 구성한다. 그리고 앞서 서빙된 본 프로그램을 고려해 효과적인 앙코르가 무엇일지 생각한다. 예를 들면 무거운 베토벤 작품 뒤에는 달콤한 슈만의 소품을 앙코르로 내놓는다. 혹은 무거운 베토벤 뒤, 가벼운 베토벤 소품도 흐름상 적절하다. 피아니스트 박재홍은 "본 프로그램이 전하고자 했던 전체적인 흐름과 상통하는 다른 작품을 앙코르로 고른다"고 전했다. 묵직한 베토벤 후기 소나타를 연주했다면 앙코르로 베토벤의 가벼운 바가텔을 연주하는 식이다. 또 생상스 서거 100주년 등 특정 작곡가의 기념해를 고려해 앙코르를 선택하기도 한다. 디저트로 제철 과일이 나오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앙코르를 연주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관객들이 본 프로그램의 여운만 간직하길 바라는 마음이다. 자칫 달콤한 디저트는 본 프로그램의 맛을 잊게 만든다. 지난달 리스트 '초절기교 연습곡' 전곡을 연주한 피아니스트 임윤찬은 관객들의 환호에도 앙코르를 연주하지 않았다. 임윤찬은 "앙코르 선정에 많은 고민이 있었다. 하지만 인생의 탄생과 죽음까지 모두 담겨 있는 이 연습곡 뒤에 더 연주할 수 있는 작품은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고, 앙코르를 연주하지 않게 되었다"고 전했다.
본 프로그램이 굉장한 여운을 남기며 끝나는 경우 앙코르의 의미가 퇴색된다. 죽은 자를 위로하는 '레퀴엠' 말러 교향곡 6번 '비극적' 등 더 이상 구원할 수 없는 슬픔으로 끝나는 작품들이 그렇다.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 말러 교향곡 2번 '부활' 등 압도적인 환희로 끝나는 작품들도 마찬가지다. 눈부실 정도의 밝은 환희 뒤엔, 그 어떠한 것도 빛을 내지 못한다. 이때 연주되는 앙코르는 새로운 기분을 환기시켜 주지 못할뿐더러, 구성상 아무 맥락도 없어진다. 안 하느니만 못하다.
이번 달 22일 예프게니 키신의 리사이틀이 서울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린다. 세계 최정상의 피아니스트인 그의 공연은 티켓 오픈과 동시에 매진됐다. 국내에서는 넉넉하다 못해 넘치는 앙코르로 더욱 유명한 피아니스트다. 2006년, 2009년 내한 공연 당시에는 10곡 이상의 앙코르를 들려주었다. 관객들은 연신 시계를 보며 대중교통이 끊기지는 않을까 행복한 고민에 빠졌다. 결국 키신은 앙코르만으로 1시간이 넘는 시간을 소요했다.
당연하게도 수많은 앙코르가 연주되면 본 프로그램에 대한 인상이 흐려진다. 앙코르가 더 기억나는 연주회가 된다. 하지만 잘 만들어진 맛있는 디저트는 끝없이 들어가는 법. 키신이 내놓은 음악들이 그랬다. 모든 앙코르가 달콤했다. 관객들은 본 프로그램을 모두 즐긴 후에도 자리를 떠날 줄 몰랐다. 디저트 배는 따로 있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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