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민캠프 안팎의 '비인간'과 싸운 로힝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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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민캠프 안팎의 '비인간'과 싸운 로힝야

입력
2021.11.01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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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hib Ullah(1974.9.26~ 2021.9.29)

방글라데시 로힝야 난민캠프 지도자 모히브 울라가 동포의 손에 암살 당했다. 그는 난민들이 겪은 미얀마 군부의 반인륜 범죄 실태를 조사해 국제사법재판소 제소를 돕고, 유엔과 국제사회에 로힝야의 귀향 대책을 호소했다. 그는 약 90만 명 난민의 비인간적 생존 공간인 캠프를 마약밀무역 거점으로 활용하는 범죄집단과 이슬람 원리주의 무장단체 등 미얀마 귀향에 반대해온 분파와의 불화, 즉 로힝야의 분열을 가장 안타까워했다. 로이터 연합뉴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1931년 '국제구호협회(International Relief Association)'를 설립한 건 나치 박해를 피해 국경과 바다를 건너야 했던 유럽 난민을 돕기 위해서였다. 협회는 42년 비시프랑스 치하의 유대인 구조단체인 '위기구난위원회(ERC)'와 통합, 국제구호위원회(IRC, International Rescue Committee)로 개칭했다. IRC는 2차대전 난민 5,000만 명에게 피난처를 제공하고 생존과 삶의 조건을 베푸는 데 기여했다.

영국 토니 블레어 내각의 환경-외무장관을 지낸 IRC 현 회장 데이비드 밀리밴드(1965~)는 2017년 4월 테드(TED) 강연에서 21세기 난민 사태를 "위기가 아닌 시험"이라고 말했다. 문명과 인류애가 직면한 시험, '우리'가 누구이며 어떤 가치를 지향하는지 답해야 하는 시험. 그는 그 시험이 "우리의 인격을 향한 시험이지 정책을 향한 시험이 아니"며, 21세기 난민 위기도 "관리할 수 있고,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고도 했다. 첫째, 난민에게 노동의 기회를 제공하고, 국제 사회가 난민을 수용한 국가를 경제적으로 지원하고, 청소년에겐 교육 받을 기회를 제공하고, 궁극적으로 세계가 그들에게 새로운 시작의 기회를 제공하면 된다는 거였다.



아득한 이상론 같겠지만, 사실 그 해법은 전혀 새로운 게 아니었다. 2차대전 전후(前後) 국제 사회가 벨기에 출신 유대인인 밀리밴드의 부모를 포함한 수많은 유럽 시민들에게 베푼 게 그거였다. 밀리밴드는 지금의 난민이 과거의 '우리'이고 미래의 '우리'일 수 있다고, 30,40년대 난민이었던 자신과 (조)부모들이 진 빚을 이제 갚아야 할 때라고 역설했다.

2017년 8월 미얀마 '로힝야(Rohingya) 사태'가 격화했다. 미얀마 군부와 불교도 폭도들이 소수 무슬림 로힝야족이 모여 살던 북동부 오지 라카인(Rakhine) 주를 조직적으로 공격,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학살- 강간하고 마을들을 불태웠다. 최소 2만5,000여 명이 숨졌고, 70만여 명이 국경 너머 방글라데시로 피신했다. 유엔 조사단이 "인종 청소의 교과서 같은 사태"라 규정한 저 학살 이후 지금까지 난민이 된 이들은 약 86만 명. 그들은 세계 최대 난민촌 중 하나인 방글라데시 국경 콕스바자르(Cox's Bazar) 지역의 황무지 캠프 30여 곳에 분산 수용된 채, 대나무와 방수천으로 얽은 가건물에서 우기(6~10월)의 재난적 폭우와 잦은 화재, 근년의 코로나19를 비롯한 전염병 위험에 노출된 채 지내고 있다.

국제구호단체 등이 지원하는 최소한의 생필품을 제외하면, 밀리밴드의 해법이 작동되는 기미는 전혀 없다. 보호 명분으로 둘러쳐진 철조망 속에 갇혀 청소년 교육은 고사하고 휴대폰과 인터넷마저 차단돼 일기예보조차 제때 보지 못하고 있고, 귀향이나 이민의 기약도 당연히 없다. 값싼 합성마약 '야바' 등의 밀거래 조직들이 아동 납치와 인신매매까지 벌이고 있고, 자생적 이슬람 원리주의 무장단체(ARSA)는 난민촌 통제권을 장악하기 위해 암살 등 폭력을 서슴지 않는다. 날이 저물면 여성들은 텐트 바깥으로 나갈 엄두조차 못 내는 그 약육강식의 지옥같은 공간에서 아이들이 태어나고 있다.

유엔 등 국제 사회의 지원을 통한 안전한 귀향 대책을 촉구해온 종교 지도자 등 온건파 난민 대표들은 범죄 집단과 ARSA 양측의 위협에 시달려왔고, 더러는 살해 당했다. 밀리밴드가 말한 '시험'에 별 관심 없는 국제 사회는 새 출발의 기회는커녕 그들의 목숨조차 사실상 방치하고 있다.

그리고 지난 9월 29일, 난민촌 최대 자치기구인 '아라칸 로힝야의 평화와 인권을 위한 협회(ARSPH)'를 이끌며 유엔난민기구(UNHCR)와 미 백악관에서 국제사회의 관심과 지원을 호소해온 로힝야의 상징적인 리더 모히브 울라(Mohib Ullah)가 쿠투팔롱(Kutupalong) 난민 캠프 D지구 자신의 집 겸 사무실 앞에서 괴한들의 총에 맞아 숨졌다. 향년 46세

2017년 미얀마 로힝야 학살 직후 라카인주 로힝야족 70여만 명이 국경을 넘어 방글라데시 콕스바자르 난민캠프로 피신했다. 화살표는 난민캠프와 미얀마에서 바다(안다만해)를 통해 인근 국가로 이동하는 로힝야족 경로. 그래픽뉴스부 김문중 기자

로힝야의 수난은 1948년 미얀마 독립과 함께 시작됐지만, 씨앗을 뿌린 건 식민지 종주국 영국이었다. 19세기 3차례 전쟁으로 버마족 통일왕국(꼰바웅왕조)을 인도 영토로 편입해 식민화한 영국은 최대 부족인 버마족 불교민족주의자들의 항거에 맞서 소수민족을 앞세운 분리-대리통치(divide and rule) 노선을 고수했다. 버마족의 전횡에 차별 받던 카렌-카친족 등을 우대했고, 무슬림 로힝야 족을 전략적으로 집단 이주시켜 토지를 불하하고 중간 관리 부족으로 부림으로써 민족간 갈등을 조장했다. 2차대전 일본군 침략 당시 미얀마 민족영웅 아웅산을 비롯한 버마족 불교도가 일본군 편에 섰던 것도, 로힝야 무슬림이 영국-인도의 지원을 받아 'V - Force'란 군대를 편성해 일본군-버마족과 싸운 것도 그런 배경에서였다. 사실상의 제국주의 대리전쟁인 1942년의 '아라칸(현 라카인주) 대학살(Arakan Massacres)'로 버마족 불교도 약 2만 명이 숨졌고, 로힝야족 약 4만 명이 일본군에 의해 보복 학살 당했다.

48년 독립 이후 미얀마(당시 버마연방) 정부와 시민들은 로힝야 족 출산 규제를 비롯, 경제-사회-교육-종교 전반에 걸친 대대적인 탄압과 억압을 시작했다. 인도 벵골지역과 방글라데시를 향한 로힝야 난민 행렬이 그 무렵부터 시작됐다. 62년 쿠데타로 집권한 네윈 사회주의 군사정권은 82년 남아 있던 로힝야족을 '벵골족' 불법 이민자로 규정, 시민권마저 박탈했다. 로힝야는 미얀마 역대 군사정권이 불교민족주의에 불을 지펴 취약한 정통성과 냉랭한 지지기반을 데우는 불쏘시개같은 존재였다.

국제 이슬람 원리주의 무장단체와 연계된 로힝야 분리주의 반군 '아라칸 로힝야 구원군(ARSA)'이 2010년대 초반 출범, 라카인 불교도들에 대한 테러와 보복테러를 감행했다. 미얀마 군경 당국의 상시 감시체제도 강화됐다. 그 긴장의 대치국면에서 ARSA가 2017년 8월 라카인 주 군 기지와 경찰서를 습격, 보안군 12명을 사살하는 사건이 터졌다. 국제 사회가 알고 있는 '로힝야 대학살'과 난민사태가, 그 사건에 대한 보복의 결과였다.

모하메드 모히브 울라가 태어난 곳이 훗날 대학살의 현장 아라칸이었다. 아버지가 교사여서 웬만큼 살았던 덕에 그는 당시 수도 양곤(현 수도 네피도)의 국립 양곤대(식물학)를 졸업했지만, 로힝야족 대졸자가 구할 수 있는 직장은 그 도시에 없었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정규 학교 교사가 아닌 개인 교사로 일하며 프랑스 민간 국제개발 NGO 'Gret'의 활동을 돕고, 라카인 주내 도시 마웅도(Maungdaw)의 한 직장에서도 일했고, 미얀마 여당이던 군부 기반 통합단결발전당(USDP)의 지구당 당직을 맡기도 했다. 훗날 난민캠프에서 그는 저 이력 때문에 미얀마 정권의 부역자라는 의심을 샀다. 그는 "현실에 얼마간은 개입해야 그 현실에서 나아갈 수 있다"고 여겼다고 반박했다.

미얀마 군대와 불교도 폭도들이 들이닥친 2017년 여름, 그는 아내(Naseema Begum)와 생후 9개월 된 아이를 포함한 9남매와 함께 이슬람 축제 겸 휴일인 '이드 알 아드하(Eid al-Adha, 2017년 9월 1일)를 앞두고 들떠 있었다고 한다. 그와 가족은 학살의 광란이 멎기까지 약 일주일간 숨소리조차 죽이며 집에 숨어 지낸 끝에 만 8일을 걸어 방글라데시 국경을 넘었다.

그는 난민캠프의 가가호호를 방문해 직접 겪었거나 목격한 군인 등의 학살-강간 등 범죄 사례를 수집하고 교차 대조해 미얀마 정부의 방대한 반인륜 범죄 자료를 구축했다. 영어에 능통했던 그는 국제난민단체와 협력하는 한편, 유엔인권이사회 조사단 등에게 자료를 제공하는 등 조사 업무를 도왔다. 뉴욕타임스는 그를 "데이터의 힘으로 인종청소의 야만에 맞설 수 있다고 믿었던 지도자"라고 소개했다.

2019년 8월, 난민캠프에서 열린 대학살 2주기 추모행사에 로힝야 난민 10만여 명이 운집했고, 주최자인 모히브 울라는 "우리는 안전하고 당당한 귀향을 원한다"고 호소했다. 저 행사 이후 그는 방글라데시 치안당국의 분노를 샀고, 캠프 내 이슬람 원리주의 무장단체 및 범죄집단의 암살 위협도 거세졌다. AFP 연합뉴스

울라는 2019년 8월, 방글라데시 치안당국의 반대를 무릅쓰고 난민캠프에서 대학살 2주기 추모행사를 개최, 운집한 10만여 명의 난민 동포와 세계인을 향해, '현상 유지'에 목을 매던 무장 범죄집단과 투쟁 노선의 ARSA를 향해, "우리는 안전하고 당당하게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바란다"고 외쳤다. 행사 직후 방글라데시 당국은 "난민 보호를 위해" 캠프를 철조망으로 두르고, 휴대폰을 압수하고, 인터넷 망을 차단했다. 올해 행사는 코로나 팬데믹 영향으로, 모든 난민이 텐트에 칩거하는 침묵시위로 대체됐다.

이듬해 3월 유엔인권이사회 40차 총회장 연단에 초대된 울라는 "여러분이 국적도 나라도 없고 민족 정체성도 부정당하고 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누구도 당신을 원치 않는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로힝야가 지금 그런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로힝야이고, 미얀마 시민입니다"라고 호소했다.

그해 7월 18일 미 백악관 종교자유특사 샘 브라운백(Sam Brownback)의 주선으로 전세계 종교 탄압 피해자 대표 10여 명이 백악관을 방문, 트럼프 당시 대통령을 만났다. 울라가 로힝야 난민캠프에 살고 있다고 자신을 소개한 뒤 "나와 동포 무슬림들의 미얀마 귀향을 돕기 위한 계획이 있느냐"고 묻자, 트럼프가 "그게 어디냐"고 특사에게 되묻는 장면이 뉴스 영상을 통해 전세계에 방영됐다.



로힝야 제노사이드 피해자 875명의 인터뷰를 담은 유엔인권이사회 보고서에 응답, 2019년 11월 미얀마 정부를 '로힝야 집단 박해와 인종청소' 혐의로 국제사법재판소(ICJ)에 제소한 것은 서아프리카 소국 감비아공화국과 몇몇 학자들이었고, 미얀마 정부 변호인 대표단 대표는 1991년 노벨평화상 수상자 아웅산 수찌였다. 군부와 권력을 분점하던 당시의 수찌는 로힝야 학살을 일관되게 부인하며 사태 본질을 '국내 무력분쟁'이라고 주장했다. 재판은 지금도 지리한 공방 중이다.

'데이터의 힘'을 믿고, 정의와 휴머니즘, 인류애를 믿었던 울라는 절망과도 싸워야 했고, '합법 이민'이라는 사적인 유혹과도 싸워야 했다. 물론 그는 늘 난민캠프로 돌아오곤 했다. 상하수도와 화장실 등 모든 게 부족하고 불편하고 불결한 캠프지만 그를 가장 힘들게 한 것은 캠프의 분열이었다. 2018년 LA타임스 인터뷰에서 그는 "비록 살아 있어도 짐승과 다를 바 없다"며 "우리에겐 인권도, 교육 받을 기회도 없다. 물도 화장실도 없고, 안전조차 없다. 누구도 우리를 위해 싸워주는 이도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듬해 1월에는 "우리가 똘똘 뭉쳐 세계 지도자들에게 인류애를 발휘해달라고 호소해야 한다"고, "그들이 우리의 처지(와 바람)를 충분히 안다면 우리를 이해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에 대한 암살 위협은 끊이지 않았다. 국제여론을 염려한 방글라데시 치안 당국이 그를 캠프 바깥 안전가옥으로 대피시킨 적도 있었다. 2019년 로이터 인터뷰에서 그는 "죽어도 상관없다. 내 목숨 쯤은 바칠 수 있다"고 말했다.

지난 9월 29일, 저녁 기도 행사를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온 그는 괴한들에 의해 총 세 발을 맞고 캠프내 국경없는의사회 병동으로 이송되던 중 절명했다. 현장에 있던 동생 하비브(Habib)는 "범인 중 세 명은 누군지 아는 사람이고, 나머지도 캠프에서 마주친 적이 있어 식별할 수 있다"고, 직후 현지 언론 인터뷰에서 말했다. 하비브가 지목한 이들은 ARSA 조직원들이었다. 방글라데시 경찰은 10월 초 범인 일부를 캠프에서 체포, 배후에 대한 수사를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수많은 난민 인권단체가, 미 국무부가 그를 애도하며, 방글라데시 당국의 난민캠프 치안 부재를 성토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숨지기 한 달 전인 2020년 8월 현지 언론 '다카 트리뷴' 인터뷰에서 그는 세 가지를 원한다고 말했다. 국제사회가 보장하는 안전하고 당당한 귀향과 학살 책임자에 대한 정당한 재판과 참정권 등 미얀마 시민 권리의 보장이었다.

2019년 난민캠프의 난민들과 대화하는 모히브 울라. 로이터 연합뉴스.

뉴욕타임스는 그가 숨진 뒤 온건파 캠프 리더들이 잔뜩 위축돼 언론 인터뷰조차 대부분 기피하는 실정이라고 썼다. 유엔 미얀마 인권특별보고관을 지낸 이양희 성균관대 교수가 인터뷰에 응해 불과 한 달 전 울라와 통화를 했다며 "그는 항상 웃으며 성실하고, 단호하고, 두려움 없이 용기를 내던 사람"이었다며 "그가 얼마나 로힝야 동포를 위해 헌신했는지 어떤 말로도 표현할 길이 없다"고 말했다.

밀리밴드는 TED 강연 말미에, 자신은 세계의 모든 문제가 서양으로부터 왔다고 믿는 사람은 아니며 그것이 사실도 아니라고 말했다. "하지만 우리가 잘못을 저질렀을 때 우리는 그것을 인식해야 한다"고 "다른 어떤 국가보다 더 많은 난민을 수용한 미국이 다른 어떤 국가의 난민보다 베트남 난민을 가장 많이 수용한 것은 우연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의 말대로라면, 로힝야 난민사태에 가장 큰 책임은 애매한 '국제사회'가 아니라 그의 조국인 영국의 몫이어야 한다.

하지만 2015년 9월 내전을 피해 지중해를 건너던 쿠르드족 3세 소년 알란 쿠르디가 시신 사진으로나마 세계인, 특히 유럽인의 양심을 자극했던 건, 그의 나라 시리아가 지중해에 면한 덕이었다. 로힝야인이 영국에 닿으려면 히말라야 산맥과 티벳고원을 넘고 너른 중동 사막을 건너야 하고, 벵골만 뱃길도 남쪽 안다만 해로, 동남아시아로 열려 있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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