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수로기구(IHO)가 바다의 명칭을 숫자로 표기하기로 한 것은 굉장히 큰 결정입니다. 그렇지만 IHO의 결정이 외부에까지 영향력이 있겠느냐고 묻는 굉장히 회의적인 시각도 있습니다. 저 또한 그렇습니다. 동해-일본해 표기를 둘러싼 분쟁은 더욱 심해질 겁니다. 유엔(UN)이나 IHO와 같은 국제기구들을 설득하는 동시에 구글이나 마이크로소프트처럼 디지털 지도를 서비스하는 업체들이 균형 잡힌 결정을 내리도록 유도해야 합니다.
주성재 경희대 지리학과 교수
동해-일본해 분쟁 '2라운드' 진입
지난해 11월 16일은 동해(East Sea)라는 이름을 세계에 알리고 사용하도록 장려하는 활동에 있어서 기념비적인 날이었다. IHO가 국제표준해도집(S-23)을 대체할 새로운 디지털 문서를 발행하기로 합의하면서 바다의 명칭을 숫자로 표기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S-23은 1929년부터 한반도 동쪽 바다를 일본해(Japan Sea·Sea of Japan)로 표기해왔는데 새로운 문서에서는 이러한 명칭이 사라진다. 대신 동해도 일본해도 아닌 숫자체계가 등장한다. 해도 제작사들이 참고할 중요한 문서를 도입하는 과정에서 일본해를 단독 표기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잃은 것이다.
그러나 동해-일본해를 둘러싼 분쟁은 앞으로 더욱 심해질 전망이다. 국제기구들이 일본해 단독 표기 방침을 바꾸더라도 이러한 조치에는 강제력이 없기 때문이다. 각국 정부나 학술단체, 나아가 지도를 제작하는 기업들은 독자적으로 판단한다. 이들을 대상으로 여론전이 치열해질 수밖에 없다. 당장 지난주에는 일본 외무성이 ‘일본해-국제사회에서 유일하게 인정되는 호칭’이라는 영상을 9개 언어로 제작해 유튜브에 올리기도 했다. 2004년부터 동해 명칭 사용을 확산시키는 활동에 참여해온 주성재 경희대 지리학과 교수에게 앞으로의 과제가 무엇인지 들어봤다.
"세계 주요 지도의 50% 이상이 병기하는 성과"
현재 유엔지명전문가그룹 부의장을 맡고 있는 주 교수는 20일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동해라는 명칭을 알리는 활동은 상당한 성과를 거뒀다고 평가했다. 한국 정부가 1992년 유엔지명표준화 총회에서 처음 문제를 제기하면서 “한반도 동쪽 수역을 동해라고 불러온 사람들이 존재하는데 이 바다를 일본해라고만 표기하기는 어렵다”는 인식이 전문가 사이에 확산했고 변화로 이어졌다. 동해-일본해를 ‘분쟁 지명’으로 만드는 전략이 성공한 것이다. 일본은 “일본해를 오랫동안 무탈하게 써왔으니 동해를 병기할 이유가 없다”라고 주장하지만 국제사회에는 “분쟁이 존재한다”라고 인식하는 여론이 자리잡았다.
주 교수는 “일본이 기업들을 다시 설득하는 상황을 우려해 외교부가 공식적으로 발표하지는 않았지만 2014년 조사에서는 세계 지도의 40% 정도가 일본해와 동해를 병기하는 것으로 나타났다”면서 “현재 세계적으로 영향력이 있는 지도 제작사 20곳 정도가 발행하는 지도의 경우, 절반 이상이 동해와 일본해를 병기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일본해 표기 여전히 영향력 강해
다만 동해 단독 표기를 선호하는 국내 여론과 달리 국제사회에서는 동해와 일본해를 병기하는 방안이 현실적 대안으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한국에서는 삼국사기와 다양한 고지도를 근거로 동해가 2,000년 이상 사용된 지명이며 한민족의 문화와 정서가 담겨있는 만큼, 국제사회도 이를 존중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국제기구나 민간 업체들은 역사성이나 유래보다는 현재 세계에서 널리 사용되는 이름이 무엇인지를 중요한 근거로 여기기 때문이다.
예컨대 미국 정부의 공문서와 지도에 사용되는 국내외 지명을 통일하려고 1890년 설립된 유서 깊은 기관인 미국지명위원회(BGN)는 ‘표준 지명은 현재 가장 많이 사용되는 것’이라는 원칙을 갖고 있다. 영국지명위원회(PCGN) 역시 유사한 원칙을 따른다. 두 기관은 동해 수역의 명칭으로 일본해를 채택하고 있다. 외교부에 따르면 IHO 결의(1972년)와 유엔 지명표준화회의 결의(1977년) 역시 2개국 이상이 서로 다른 지명을 사용하는 경우, 병기를 권고한다.
일본도 역사성 주장할 근거 확보
게다가 일본 역시 고지도를 근거로 ‘일본해의 역사성’을 주장한다. 주 교수는 “역사성은 백그라운드 데이터”라면서 “동해의 역사가 긴 것은 사실이지만 일본해 표기 역시 1850년대 이후에 급속도로 확산했기에 S-23에도 들어갔던 것”이라고 덧붙였다. 주 교수는 이달 내놓은 ‘분쟁지명 동해, 현실과 기대’에서 “한국으로서는 동해의 오랜 역사가 중요하며, 일본으로서는 근대 이후 세계에서 사용된 일본해가 관심”이라면서 “일본이 말하는 근대 이후 200년이 되지 않는 역사도 긴 기간으로 보고 국제적 지명 표준화를 위한 충분한 요건을 갖추었다고 볼 수 있다”라고 지적한다. 국제사회가 한쪽 손을 일방적으로 들어주기란 어려운 상황이다. 한국 외교부 역시 병기를 주장한다.
"병기는 양국 모두 희생하지 않는 방안"
주 교수는 동해-일본해 병기를 현실적 대안이라고 설명하면서 그 근거를 역사성 너머, 사회정의와 평화의 실현으로 확장한다. 한국과 일본의 독특한 정체성이 쌓여 있는 모든 명칭을 인정하고 사용하려면 복수의 명칭을 함께 써야 한다는 이야기다. 그것은 ‘정당한 몫을 배분함으로써 어느 한 편을 일방적으로 부당하게 희생시키지 않고 관련자의 공정한 이익을 고려하는 방안’, 즉 사회정의를 실현하는 길이기도 하다.
이를 위해서는 유엔과 IHO 등 국제기구에서 전문가들을 상대로 여론전을 펼치는 동시에 민간 단체, 특히 온라인에서 지도를 제공하는 기업들을 설득하는 작업이 절실하다. 동해 표기를 확산시켜서 일본해 표기의 위상을 끌어내릴수록 BGN처럼 권위 있는 기관이 지명을 병기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주 교수는 “동해라는 명칭을 많이 쓰는 것이 우리가 바라는 점이지만 현실을 직시할 필요도 있다”면서도 “기업들은 소비자를 무시할 수 없는 만큼, 한국 독자들이 지속적으로 요구한다면 그들도 따를 것”이라고 강조했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