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조폭이어도 사연 있을 것 같은 목소리, 박희순

입력
2021.10.29 07:30
5면
0 0

편집자주

※ 여러분들이 잘 아는 배우의 덜 알려진 면모와 연기 세계를 주관적인 시선으로 전합니다.

영화 속 박희순의 다양한 모습.

영화 속 박희순의 다양한 모습.

1995년 단편영화 ‘2001 이매진’(1994)을 봤다. 눈이 확 떠지는 듯한 경험이었다. 새로운 세대가 곧 한국 영화계에 등장할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2001 이매진’은 당시 충무로에서 봉준호 감독의 단편영화 ‘지리멸렬’(1994)과 함께 화제를 모았던 수작이다. 장준환 감독은 이 영화로 봉 감독과 함께 국내 영화사들이 눈여겨보는 젊은 인재가 됐다. 한국영화아카데미(‘2001 이매진’과 ‘지리멸렬’은 졸업작품이다) 동기인 두 사람은 영화 ‘유령’(1999)의 공동 각본 작업을 하며 충무로로 진출했다.

‘2001 이매진’은 독특하다. 장 감독의 장편 데뷔작 ‘지구를 지켜라’(2003) 못지않게 기발하고 재치 있다. 1980년에 한국에서 태어난 한 청년은 자신의 전생을 팝 스타 존 레넌(1940~1980)이라고 맹신한다. 레넌이 암살된 직후 태어난 게 강력한 증거라고 여긴다. 음악성을 타고났다고 생각한다. 동그란 안경 너머 우수에 젖은 눈빛이 천재성을 강조하는 듯하다. 청년은 음반사를 찾아가 오디션을 자청한다. 그가 긴 머리를 출렁이며 열정적으로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르자 프로듀서는 머리를 쥐어 뜯으며 뛰쳐나간다.

세기 말에 만들어진 이 영화는 광기와 차가운 웃음을 동시에 뿜는다. 청년 역할을 맡은 배우의 연기가 염세주의적 분위기 조성에 한몫한다. 유약하면서도 강인함이 깃든 얼굴이 인상적이었다. 박희순에 대한 첫 기억이다.

박희순은 영화 '작전'(2009)에서 조폭 출신 주가 조작 전문가 황종구를 연기했다. 쇼박스 제공

박희순은 영화 '작전'(2009)에서 조폭 출신 주가 조작 전문가 황종구를 연기했다. 쇼박스 제공

한동안 박희순을 잊고 지냈다. ‘가족’(2004)에서 그를 다시 봤다. ‘2001 이매진’의 미치광이 청년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가족’에서 그는 조폭 두목 창원을 연기했다. 조폭 소재가 충무로 대세였던 시절이었다. 문신이나 흉터로 과장되게 묘사된 조폭을 배우가 감정을 과하게 드러내며 연기하곤 했다. 박희순은 달랐다. 냉정하고 단호하면서도 정제된 폭력성을 드러냈다. 짧은 등장에도 불구하고 긴 여운을 남기는 연기였다.

2005년 10월 부산국제영화제 취재를 갔다가 밤 술자리에서 운 좋게 박희순과 마주하게 됐다. ‘가족’에서의 호연을 언급하자 그는 고마워하면서도 달가워하지 않았다. 조폭 연기로 이미지가 고정될까 봐 우려했다. ‘가족’ 이전 출연작 ‘보스 상륙 작전’(2002)에서도 조폭을 연기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막 충무로에 안착한 배우로서 가질 만한 경계심이었다. 박희순은 영화계로 들어오기 전 대학로 연극 무대에서 연기 잘하는 꽃미남 배우로 이름이 높았다.

박희순은 영화 '맨발의 꿈'(2010)에서 동티모르 유소년 축구팀 코치 원광을 연기하며 새로운 면모를 보였다. 쇼박스 제공

박희순은 영화 '맨발의 꿈'(2010)에서 동티모르 유소년 축구팀 코치 원광을 연기하며 새로운 면모를 보였다. 쇼박스 제공

‘가족’ 이후 박희순은 다양한 역할을 소화했다. 형사로 출연(‘세븐 데이즈’ ‘1987’)하기도 하고, 축구 코치(‘맨발의 꿈’)가 되기도 했다. 소탈한 면모를 보였다가 냉혈한의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다. 특이하게도 그는 조선 왕을 세 차례 연기했다. ‘가비’(2012)에서 고종, ‘물괴’(2018)에서 중종, ‘광대들: 풍문조작단’(2019)에서 세조를 각각 맡았다. 형사와 조폭 역할을 소화하면서도 왕을 연기하는 배우가 한국에서 몇이나 있을까. 박희순은 어느 이미지에 고착되지 않은 채 어떤 역할이든 안정적으로 소화해낼 수 있는 몇 안 되는 배우라는 생각이 든다.

여러 장점이 있겠으나 박희순의 가장 큰 매력은 물기 어린 목소리다. 제아무리 악역을 맡는다고 해도 저 목소리에는 뭔가 사연과 정감이 담겨 있는 듯해 마냥 미워할 수 없다. 비장미 어린 역할을 하기에는 최적의 목소리다. 친구였으나 원수가 된 인물을 패잔병으로 도망치던 중에 만나 파국으로 치닫게 되는 조선 장수 헌명(‘혈투’)을 연기했을 때도, 남한으로 도망친 살인마를 잡기 위해 동분서주하다가 비극적 최후를 맡게 되는 북한 장교 리대범 역(‘브아아이피’)을 맡았을 때도 목소리는 얼굴 표정이나 몸동작 이상의 역할을 한다.

박희순은 영화 '광대: 풍문조작단'(2019)에서 세조를 연기하는 등 세 차례 조선 왕 역할을 맡아 연기 스펙트럼을 과시했다. CJ ENM 제공

박희순은 영화 '광대: 풍문조작단'(2019)에서 세조를 연기하는 등 세 차례 조선 왕 역할을 맡아 연기 스펙트럼을 과시했다. CJ ENM 제공

박희순은 최근 넷플릭스 드라마 ‘마이 네임’으로 눈길을 끌고 있다. 마약 조직 두목 최무진을 연기했다. 주인공 윤지우(한소희) 아버지의 죽음과 연계돼 있는 듯하면서도 그럴 만한 곡절이 있어 보이는 인물이다. 그가 저음으로 “상처 없이 장례 치르게 해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할 때 살벌함보다는 기이한 낭만이 풍긴다. 한때 조폭 연기를 꺼려했으면서도 결국 조폭 연기로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은 게 얄궂기는 하나, 그의 진면목을 다시 확인할 수 있어 반갑다.

라제기 영화전문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