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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던 신념이 세상에 꺾일 때

입력
2021.10.26 04:30
수정
2021.10.26 07:39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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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해진 ‘한여름의 유통기한’(쓺 13호)

편집자주

단편소설은 한국 문학의 최전선입니다. 하지만 책으로 묶여나오기 전까지 널리 읽히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한국일보는 '이 단편소설 아시나요?(이단아)' 코너를 통해 흥미로운 단편소설을 소개해드립니다.


지난해 12월 12일 영국 런던 레스터스퀘어 인근에서 홍콩 민주화를 촉구하는 집회가 열리고 있다. 런던=AFP 연합뉴스

지난해 12월 12일 영국 런던 레스터스퀘어 인근에서 홍콩 민주화를 촉구하는 집회가 열리고 있다. 런던=AFP 연합뉴스


나이가 들며 깨달은 삶의 비릿한 속성은, 세상의 많은 일들이 ‘응당 그럴 만’하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착한 사람들은 자주 배반당했고, 간절한 이들의 소원은 끝내 응답받지 못했다. 그런 일들을 겪으며 가장 먼저 포기하게 되는 것은 신념이었다. 무엇보다도 먹고사는 건 정말이지 힘든 일이어서, 그 이외의 것들을 끝까지 지켜내기란 쉽지 않아 보였다.

쓺 13호에 실린 조해진의 단편소설 ‘한여름의 유통기한’은 그 먹고사는 일의 험악함으로 인해, 빛나던 신념이 세상에 꺾인 한 커플의 이야기다.

미령과 경훈은 자신이 믿는 바에 따라 일을 택했다. 미령은 “영화 하고 싶으면 폼 잡지 말고 세상에 애틋한 사람이 되어라”는 은사의 말을 간직하며 영화계에 남았고, 경훈은 대학에서 아시아 국가들의 민족주의와 민주화를 연구했다.

둘에게도 “감각되는 모든 것은 언제라도 투명한 정념으로 부풀어 오를 수 있었던 시절”이 있었다. 7년 전 미령과 경훈은 홍콩에 있었다. 당시 학민사조 운동에 참여한 홍콩 학생들의 인터뷰를 위해 홍콩으로 향했고, 그곳에서 토니를 비롯해 여러 청년 활동가들을 만났다.

한때 토니만큼이나 열렬했던 미령과 경훈의 신념과 사랑은, 생의 여러 고비 앞에서 점차 꺾였다. 경훈은 소속돼 있던 대학 연구소가 문을 닫으며 실직자가 됐고, 전셋집의 계약이 만료됐지만 새 계약을 할 돈은 없었다. 여동생에게 카드 대출로 돈을 빌려줬고, 매부가 운영하던 가게는 망했다.

“누구의 잘못도 아닌데 가게는 망하고 사람은 막 망가지는” 일을 겪으며, 그들은 “영혼에도 좀이 슨다”는 것을 깨닫는다. “불의로 판단되는 즉시 분연히 일어나 뛰쳐나가곤 했던 자신의 청년이 이미 지나가버렸다는 것”을 인정한다.

조해진 소설가. 한국일보 자료사진

조해진 소설가. 한국일보 자료사진


그러던 그들에게 토니로부터 연락이 온다. 반중국 운동을 한 경력이 있던 토니는 홍콩 국가보안법의 레이더망에 걸려 있었고, 자신의 죽음을 감지하고 있었다.

“스물네 살의 성인이 된 토니가 어떤 위험에 노출됐는지 걱정은 됐지만 지금 당장 홍콩으로 날아가 토니와 접속한다든가 그가 가담한 조직에 후원금을 대줄 수는 없는 것이다. 미령과 경훈은 아직 새로운 거처를 구하지 못한 상태였다. 집이 없어 떠돌지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그런 상상은 뭐랄까, 달콤하지만 바스라지기 쉬운 설탕 같은 것이었다.”

토니는 경훈에게 “내가 혹시 시체로 발견되면…”이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메시지를 남긴다. 망설임 끝에, 미령과 경훈은 토니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결심한다.

얼마 전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 ‘노회찬6411’은 평생을 진보정치에 헌신하며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고자 했던 노회찬(1956~2018) 전 의원의 삶을 그린다. 영화는 고인의 생전 육성으로 시작한다. “남은 인생을 어디에 바쳐야 할까(…)자기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는 소외된 그런 노동자들과 함께해야겠다.” 그의 다짐이 이후에 어떻게 체현됐는지, 그 길이 얼마나 험난했는지, 하지만 얼마나 값졌는지는 남아있는 사람들이 기억할 것이다. 영화의 영어 제목은 ‘The Man with High Hopes’다. 이상은 자주 꺾인다. 그래도 꺾인 자리에서부터 다시 시작되는 일들이 있다.

한소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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