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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만 살리면 되겠습니까, 연구자가 살아야 합니다"…연구자 권리선언 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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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만 살리면 되겠습니까, 연구자가 살아야 합니다"…연구자 권리선언 시동

입력
2021.10.25 04:30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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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유행하는 한편, 지방 대학의 위기가 본격적으로 드러나면서 인문사회과학 연구의 토대가 빠르게 붕괴하고 있습니다. 대학이 문을 닫거나 수업과 학과를 통폐합하는 경우가 늘어납니다. 연구자가 생계를 유지하고 안정적으로 연구하기가 어려워지는 거죠. 대학 구조조정의 본질이 대학 살리기로 흐르면 결국 문제 있는 재단이나 경영진에게 면죄부를 주는 꼴이 될 수 있습니다. 대학만 살리면 되겠습니까, 연구자가 살아야 합니다.

박배균 서울대 지리교육과 교수

대학이 학령인구 감소로 존립을 위협당하는 상황에서 인문사회과학 분야 연구자들이 ‘국가가 나서 연구 공공성을 보호하고 안정적인 연구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는 취지의 선언문을 발표하고 연구자 동참을 호소하고 나섰다. 사단법인 '지식공유 연구자의 집'과 대학원생노조, 한국비정규교수노조 등 13개 연구자 단체가 결성한 ‘연구자 권리증진과 차별철폐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가 이달 초 ‘연구자 권리선언’을 발표한 것이다. 선언은 연구자가 연구 노동자로서 합당한 대우를 받아야 하고 물리적·문화적으로 안전하고 안정적인 환경에서 연구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19일 서울 서대문구 천연동의 '참세상'에서 만난 공대위 관계자들은 연구자가 인문사회과학 연구를 지속하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인문학 연구는 당장 돈이 되지 않는다’ 또는 ‘실용적이지 않다’는 인식이 정부와 대학은 물론, 사회 전반에 퍼지면서 연구자가 설 자리를 잃고 있다는 이야기다. 학자의 길을 포기하는 대학원생이 늘어나는 상황에서 이들에게 ‘대학 폐교’와 ‘학과 통폐합’은 생경한 표현이 아니다. 구조조정의 칼날은 과학기술 분야보다 인문사회과학 분야에 더욱 날카롭다.

선언 초안을 작성한 박철현 국민대 중국인문사회연구소 HK교수는 “지방의 모 대학교가 인문사회과학 관련 학과를 폐과하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을 최근에 들었다”면서 “학생들이 학교를 다니는 상황에서 당장 이름을 공개하기는 어렵지만 역사가 오래되고 훌륭한 교수와 연구자가 있는 곳마저 상황이 그렇다”고 설명했다.

연구자 권리선언을 발표한 연구자 권리증진과 차별철폐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 관계자들이 19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천연동의 참세상 사무실에서 선언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왼쪽부터 배성인 학술단체협의회 운영위원장, 박철현 국민대 중국인문사회연구소 교수, 박배균 서울대 아시아연구소 교수. 홍인기 기자

연구자 권리선언을 발표한 연구자 권리증진과 차별철폐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 관계자들이 19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천연동의 참세상 사무실에서 선언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왼쪽부터 배성인 학술단체협의회 운영위원장, 박철현 국민대 중국인문사회연구소 교수, 박배균 서울대 아시아연구소 교수. 홍인기 기자

권리선언은 연구자 스스로 현실을 자각하고 행동하기를 촉구하는 뜻에서 탄생했다. 박배균 교수는 “과학자들은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지원해 주지만 교육부는 대학을 교육의 틀로만 본다”면서 “(인문사회과학) 연구자가 사회에 기여할 수 있도록 연구 기반을 닦는 데 관심이 있는 국가기관이 아예 없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배성인 학술단체협의회 운영위원장은 “연구자 스스로 우리의 노동이 제대로 존중받고 있는지 따져보고 권리 찾기 운동을 전개하자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따라서 이번 선언은 교수뿐 아니라 저임금 노동에 시달리며 재계약을 걱정하는 강사, 수직적 위계질서에 억눌린 대학원생 등 모든 연구자를 위한 선언이다. 선언 제1조는 연구자를 ‘연구 노동을 수행’하는 사람으로 규정한다. 특정 기관에 적을 두지 않은 ‘독립 연구자’까지 포함하는 개념이다. 박철현 교수는 “초안을 작성한 이후 토론회를 거치면서 여러 단체가 선언문 작성에 참여했다”면서 “대학원생 등 다양한 연구자 집단이 함께하면서 추상적이고 엉성했던 부분이 명확해졌고 내용에 진정성이 생겼다”고 설명했다. 예컨대 한 여성 대학원생이 작성에 기여한 제5조 제3항에는 연구자에게 폐쇄적이고 권위적인 환경에 고립되지 않을 권리가 있다는 내용이 담겼다. 연구자에게 연구활동 및 정신적·신체적 건강을 위해 타인에게 침탈받지 않는 시·공간을 보장받을 권리가 있다고 주장한 제4항 역시 현장 경험이 반영된 부분이다.

연구자들이 특권을 요구한다는 오해를 받을 수 있다는 의견에 대해 배 위원장은 “고학력자인 점을 제외하면 많은 연구자가 비정규직 노동자와 비슷한 상황에 놓여 있다”면서 “한 달에 50만 원, 60만 원 벌면서 연구하는 사람도 많고 1인 가구도 많다”고 설명했다. 배 위원장은 인터뷰 시점까지 1,000여 명이 선언에 서명했다고 밝히면서 “확실히 교수 참여도가 낮지만 그래서 지금부터라도 내부의 구조적 문제에 손을 대야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박배균 교수 역시 “교수 임금을 깎아 더 많은 사람에게 혜택이 돌아가는 급진적 고민도 내부적으로는 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공대위는 다음 달 10일까지 온라인에서 서명 동참자를 모집하고, 이를 발판으로 연구자 복지를 위한 입법 활동을 전개할 계획이다. 배 위원장은 “내년 8월이면 강사법 시행 3년이 돼, 이때 재계약 여부를 놓고 걱정하는 강사들은 단기적 성과를 위한 논문을 써내기 바쁠 것"이라며 "연구가 제대로 될 리 있겠나”라고 반문했다. 박배균 교수는 “수많은 연구자가 그들 뒤로 새로운 박사가 무더기로 있는 상황에서 대부분 재계약에 실패할 것”이라며 “공대위는 연구자 사이의 차별을 철폐하는 운동과 함께 ‘연구자 복지법’ 입법 활동에 나설 계획”이라고 밝혔다.

김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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