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참전' 아버지 일찍 여읜 1950년생 A씨
'美 이민' 위해 숙모 딸이라 주장해 확정 판결
유공자 자녀로 수당받다가 돌연 끊기자 소송
"친부=유공자" 주장했으나 선행 판결에 발목

게티이미지뱅크
6·25전쟁에서 전사한 아버지를 둔 70대 딸이 국가유공자 자녀로 인정해달라며 보훈당국을 상대로 소송을 냈지만 대법원에서 패소가 확정됐다. DNA 검사 등 친자관계를 밝힐 증거는 충분했지만, '부녀 관계가 아니다'라는 35년 전 판결이 발목을 잡았다.
두 번의 친생자 소송 끝에 남은 '부모 없음'
1950년 4월 서울에서 태어난 A(71)씨는, 그해 6월 결혼한 C씨와 D씨 사이 자녀로 출생신고됐다. 부친인 C씨는 6·25전쟁에 참전했다가 이듬해 2월 전사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머니의 개가로 쉽지 않은 유년기를 보냈던 A씨는 30대 중반쯤 법적인 부모가 바뀌게 된다.
미국에 살던 숙모는 1986년 ‘가족 초청’ 형식으로 A씨의 미국 이민을 추진했다. 그리고 한국 법원에 A씨에 대한 '친생자 관계 부존재 확인 소송'을 내며 "생계가 어려워 아이를 숙부 C씨에게 맡겼던 것이지 실은 내 딸"이라고 주장했다. 직계가족이 아니면 '가족 초청 이민'에 장시간이 걸린다는 점을 감안해 이 같은 '허위 주장'을 한 것이었다. 법원은 숙모의 주장을 받아들여 "A씨는 C씨와 D씨 사이의 자녀가 아니다"라고 판결했다. 다만 A씨의 이민은 끝내 성사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A씨는 2002년부터 6·25 전사자 자녀수당을 받았다. 하지만 보훈 당국은 2014년 가족관계등록부상 A씨가 C씨 딸이 아니란 걸 알게 됐고, 곧바로 수당을 끊었다. 변호사인 A씨의 사촌 오빠는 이런 상황을 안타깝게 여겨 다시 ‘친생자 관계 부존재 확인 소송’을 제기했고, 숙모가 친모가 아니라는 점을 법적으로 입증했다. A씨는 이를 근거로 실제 친부모를 다시 가족관계등록부에 올리려 했지만 법원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1986년 판결과 모순된다'는 이유였다. 결국 A씨는 부모를 공란으로 비워둔 채 홀로 가족관계등록부를 만들었다.
"친부가 유공자" 소송냈지만 기판력에 발목

제66회 현충일인 지난 6월 6일 서울 중구 서울도서관 외벽 꿈새김판에 국내외 6.25 참전용사 131명의 사진 전시와 함께 '마지막 한 분까지 기억하겠습니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뉴시스
보훈당국은 이를 근거로 '국가유공자(C씨)의 자녀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최종 결정을 A씨에게 통보했다. A씨는 이에 불복, 소송을 냈지만 결과는 패소였다. 친척들과의 DNA 비교 검사 결과, 학창시절 생활기록부, 친척들 진술, 할아버지 묘지에 적힌 이름 등 A씨의 친부모가 C씨와 D씨임을 가리키는 증거는 차고 넘쳤지만 법원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유는 법적 안정성을 위한 '기판력'(확정 판결에 부여되는 구속력) 때문이었다. 1심은 “(1986년) 확정심판에 따라 A씨가 C씨 친생자가 아니라는 신분관계가 확정됐기에 소송에서 그와 반대 되는 신분관계를 주장할 수 없다”고 밝혔다.
유일하게 A씨 손을 들어줬던 항소심 재판부는 "A씨가 C씨와 사실상의 친자관계에 있는 자녀임을 부인할 수 없고, 친생자 관계는 인간의 혈연적·정서적 뿌리와 연결된 기초적인 관계"라면서 "(1986년) 심판의 기판력에 대세적인 효력이 있다는 사정만으로 원고를 국가유공자의 자녀가 아니라고 보는 것은 심히 불합리하고 부당하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대법원 2부(주심 조재연 대법관)는 "법원으로서는 확정심판 기판력에 저촉되는 판단을 할 수 없다"며 사건을 원고 패소 취지로 파기환송했다고 20일 밝혔다. 사실관계가 어떻든 앞선 판결의 효력을 무시하는 새 판단을 내릴 순 없다는 것이다. A씨 측 대리인은 "파기환송심 선고 후 재상고를 해 대법원 전원합의체의 판단을 구해볼 생각"이라고 밝혔다. 민사소송법상 제기 기간인 5년을 넘겨, 앞선 판결에 대한 재심 청구도 불가능한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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