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주민 갑질' 첫 산재 인정 모른 채… 병상서 눈감은 경비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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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입주민 갑질' 첫 산재 인정 모른 채… 병상서 눈감은 경비노동자

입력
2021.10.21 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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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차위반 딱지 붙였다고?
입주민에 폭언·폭행 당해
올초 의식잃고 쓰러져 투병
산재 승인 받았지만 끝내?
식물인간 상태로 삶 마감
'입주민 갑질' 경각심 불구
경비원 산재 인정은 요원

지난해 6월 5일 오후 6시 10분쯤 경기 군포 아파트 경비노동자 정모(56)씨가 입주민에게 폭언폭행을 당하는 장면.


산재를 인정받으면 뭐합니까. 갑질당한 동생은 산재 인정소식도 모른 채 병상에 누워 있다 세상을 뜨고 말았는데...

고(故) 정안수씨의 형 한수씨

경비노동자 중 처음으로 갑질 피해에 따른 산재 인정을 받았던 정안수씨가 지난달 17일 숨졌다. 향년 56세. 정씨는 경기 군포시 아파트 경비원으로 일하던 지난해 6월 입주민에게 폭언과 폭행을 당한 충격으로 심신의 고통을 겪다가 올해 초 쓰러져 의식불명 상태로 투병해왔다. 정씨는 지난해 9월 주변의 도움을 받아 산업재해 신청을 했고, 근로복지공단은 그가 혼수상태로 중환자실에 입원해 있던 올해 1월 13일 산재 승인을 했다. 정씨는 결국 산재 인정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너무 늦게 당도한 '산재 인정' 통지

20일 유족에 따르면 정씨는 올해 1월 1일 집에서 쓰러져 병원으로 옮겨졌다. 인공호흡기를 달고 중환자실에 입원했다가 요양병원으로 옮겨졌고 지난달 삶을 마감했다. 독신인 정씨가 식물인간 상태로 연명한 260일의 시간은 지켜보는 가족에게도 고통이었다. 정씨의 형 한수씨는 "가족 대부분이 동생이 쓰러지고 나서야 그렇게 아프게 된 사연을 알았다"며 "동생에게 묻고 싶은 것이 산더미 같았지만 끝내 어떤 말도 듣지 못했다"고 말했다.

정씨가 중환자실에 있던 기간, 가족들은 소생 가능성이 없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 가족회의를 열어 치료를 중단하려고 했다. 하지만 정씨가 깨어날지도 모른다는 실낱같은 기대감에 2월부터 요양병원으로 옮겨 연명치료를 이어갔다. 전남 고흥군에 사는 84세 노모에게 자식을 앞세우는 슬픔을 주고 싶지 않았다. 한수씨는 "동생이 떠나기 전날, 아들의 마지막 모습을 보려고 고흥에서 울면서 찾아온 어머니의 모습을 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정씨가 몹시도 기다렸던 산재 인정 소식은 그가 의식을 잃은 지 2주 뒤에야 당도했다. 수모를 당했던 아파트의 다른 입주민들과 경기도 노동권익센터, 마을노무사의 도움을 받아 정씨가 지난해 9월 근로복지공단 안양지사에 산재 신청을 한 결과였다. 정씨의 고통이 고스란히 담긴 심리학적 평가 보고서를 토대로 근로복지공단은 ‘외상성 신경증’으로 산재를 승인했다. 이로써 정씨는 갑질 피해로 산업재해를 인정받은 첫 번째 경비노동자가 됐다. 두 번째 사례는 그다음 달 산재 인정을 받은 고 최희석씨였다. 최씨는 지난해 5월 입주민에게 폭행과 욕설을 당한 뒤 '억울하다'는 유서를 남기고 생을 마감해 충격을 줬다. 한수씨가 '동생의 맷값'이라고 부른 산재 보상금은 정씨의 병원비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정씨의 부고에 아파트 입주민들도 크게 상심했다. 입주민 A씨는 "최희석씨는 극단적 선택을 하고 나서야 국가로부터 산재 인정을 받았지만, 정씨에겐 살아생전 소식을 전할 수 있길 바랐다"면서 "또다시 갑질로 숨진 경비노동자가 생겨 허탈한 심경"이라고 말했다.

앞서 정씨는 지난해 6월 5일 자신이 경비원으로 근무하던 아파트에서 불법 주차된 차량에 주차위반 딱지를 붙였다가 차주인 입주민에게 폭언과 폭행을 당했다. 5분간 이어진 갑질의 충격은 불면증과 우울증으로 이어져 정씨의 삶을 송두리째 무너뜨렸다. 그토록 바라던 재계약을 포기하고 그달 말 사직한 정씨는 이후 5차례에 걸쳐 정신과 치료를 받았고 올해 초 다시는 깨어나지 못하게 되기까지 의식을 잃고 병원에 실려가길 반복했다.(▶관련기사: '입주민 갑질' 첫 산재 인정 모른 채… 사경 헤매는 경비노동자)


경비노동자 갑질피해 기관별 접수현황. 강준구 기자


산재 인정 2명뿐… 피해신고 되레 급감

정씨가 산재 인정을 통해 경비노동자에 대한 갑질 관행에 경종을 울리고 피해자 구제의 길도 열었지만, 경비노동 환경의 전반적 개선까지는 갈 길이 멀어 보인다.

한국일보가 입수한 경비노동자 갑질 피해 신고접수 기관(국민권익위원회 서울노동권익센터 경기노동권익센터)의 통계 자료에 따르면, 올해 1~9월 피해 신고접수 건수는 116건으로 지난해 8개월간(5~12월) 접수된 172건보다 33%가량 줄었다. 특히 올해 신고된 피해 사례 가운데 산재 신청으로 이어진 경우는 전혀 없었다. 올해 1, 2월 정안수·최희석씨가 잇따라 산재 인정을 받았지만, 이런 구제책이 확산될 조짐이 보이지 않는 셈이다.

남우근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정책위원은 "경비노동자의 계약상태가 불안정하다 보니 갑질을 당하더라도 일자리를 지키려고 피해 사실을 알리는 것을 주저하고 있다"면서 "경비노동자의 안정적 근무환경 조성이 선행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노동권익센터 관계자는 "경비노동자들이 갑질 피해 사실을 쉽게 알릴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모색 중"이라고 밝혔다.


김영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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