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죽음 앞 전투태세 유지” ‘최고’ 군인·전략가·외교관 파월 기린 미국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죽음 앞 전투태세 유지” ‘최고’ 군인·전략가·외교관 파월 기린 미국

입력
2021.10.19 14:00
수정
2021.10.19 14:24
0면
0 0

흑인 최초 합참의장·국무장관 역임 파월 별세
바이든 대통령 "전사, 외교관으로 이상적 현신"
이라크 침공 오점 남겼지만 '파월독트린' 평가

18일 별세한 콜린 파월(왼쪽) 전 미군 합참의장이 1991년 걸프전 사막의 방패 작전 당시 노먼 슈워츠코프 당시 미군 중부군사령관과 이야기하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18일 별세한 콜린 파월(왼쪽) 전 미군 합참의장이 1991년 걸프전 사막의 방패 작전 당시 노먼 슈워츠코프 당시 미군 중부군사령관과 이야기하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흑인 최초로 미군 합참의장과 국무장관을 지냈던 콜린 파월이 향년 84로 별세한 18일(현지시간) 미국 전역은 추모와 애도 분위기가 가득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을 비롯해 각계에서 추모 메시지가 쏟아졌다. 미국 백악관과 국회의사당 등에는 조기가 내걸렸다. 신문과 방송 등 언론도 온종일 그의 공과를 기리는 특집 보도를 이어갔다.

추모는 군인과 외교관 모두에서 최고의 위치에 올라 많은 성과를 남겼던 파월의 역량에 맞춰졌다. 바이든 대통령은 “파월은 전사이자 외교가로서 이상적인 현신”이라며 “전쟁에서 싸우면서도 그는 군대만으로 평화와 번영을 지킬 수 없다는 점을 누구보다 잘 이해했다”고 치켜세웠다.

실제로 35년의 군 복무기간 중 파월은 베트남전쟁 두 차례 참전, 북한과 맞서는 주한미군 대대장 근무, 최정예부대 101공수사단 연대장 같은 군 엘리트 전투 보직을 모두 소화했다. 준장으로 첫 별을 달았던 1979년 파월은 42세에 불과했다. 당시 육군 최연소 장성 기록이었다. 특히 1989년 4성 장군이 돼 미군을 이끄는 합참의장 자리에 흑인으로는 처음 이름을 올리며 ‘백인 중심 군 엘리트 천장’을 돌파했다.

18일 별세한 콜린 파월 전 미군 합참의장. 로이터연합뉴스

18일 별세한 콜린 파월 전 미군 합참의장. 로이터연합뉴스


일선 군인만이 아니라 전략가로도 뛰어났다.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 당시 국방장관 선임 안보보좌관, 대통령 국가안보보좌관으로 일하며 레이건 대통령이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과 새로운 미소 협력 시대를 여는 데 중추적 역할도 했다. 미 일간 뉴욕타임스(NYT)는 파월을 두고 “미국의 국가안보를 만들었던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냉전 직후 ‘파월 독트린’으로 미국의 군사안보전략 원칙을 확립한 것도 높이 평가 받고 있다. ‘미군은 가능한 한 무력 개입을 피하되, 개입이 불가피할 경우 분명한 정치적 목표를 확인하고, 대중의 지지를 얻으며, 결정적이고 압도적 군사력 투입으로 속전속결 승리를 이끈다’는 전략이다. 1989년 파나마 침공, 1991년 걸프전 42일 만의 승리 등에서 빛을 발했다고 NYT는 분석했다.

외교관으로서의 평가는 엇갈린다. 파월은 2000년 조지 W 부시 대통령 당선 직후 국무장관으로 발탁돼 2001년부터 4년간 일했다.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은 “파월은 자신의 지도력, 경험, 애국심의 최고치를 국무부에 기여했다”라고 기렸다. 북핵 협상 과정에서 한국 외교관들과도 협력했다. 하지만 강경 ‘네오콘’에 둘러싸여 부시 행정부의 일방주의 외교를 무력하게 이행했다는 평가도 나온다.

18일 별세한 콜린 파월 전 국무장관이 2003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이라크와 관련해 연설을 하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18일 별세한 콜린 파월 전 국무장관이 2003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이라크와 관련해 연설을 하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2003년 2월 유엔에서 76분간 했던 이라크 무장 해제 필요성 연설도 오점으로 남아 있다. “사담 후세인이 대량살상무기(WMD)를 더 보유하도록 내버려두는 것은 9ㆍ11테러 이후 세계에서는 선택 사항이 아니다”라는 그의 주장은 2003년 미군의 이라크 침공 명분으로 활용됐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거짓 정보에 놀아난 꼴이 됐다. 그는 2년 뒤 공개적으로 유엔 연설 과오를 인정했다. 2007년 인터뷰에서 파월은 “최선을 다한, 성공한 군인으로 평가받는 게 내가 하고 싶은 것”이라고 회한도 드러냈다.

파월과 39년 전부터 인연을 맺었다는 미 일간 워싱턴포스트의 ‘워터게이트’ 특종 기자 밥 우드워드는 지난 7월 그와 마지막으로 인터뷰했다며 이날 부고 기사를 남겼다. 다발성 골수종암, 파킨슨병에 시달렸던 말년의 파월에 대해 우드워드는 “죽음이 다가왔을 때에도 파월은 여전히 전투태세를 유지하고 있었다”라고 묘사했다.

콜린 파월 전 미국 국무장관이 별세한 18일 워싱턴 백악관에 그를 추모하는 조기가 걸려 있다. 워싱턴=AP 연합뉴스

콜린 파월 전 미국 국무장관이 별세한 18일 워싱턴 백악관에 그를 추모하는 조기가 걸려 있다. 워싱턴=AP 연합뉴스


워싱턴= 정상원 특파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