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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창근 대구대 교수 "독도 지키기, 제대로 된 '한 사람'이 중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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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창근 대구대 교수 "독도 지키기, 제대로 된 '한 사람'이 중요"

입력
2021.10.16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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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 ‘평화선’? 독도 영유권 국제사회에 확인 계기
신한일어업협정 영토와 무관하지만 빌미 제공??
시모조 마사오, 독도 우경화에 결정적 역할


최장근 대구대 교수는 "일본의 우경화는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라면서 "일본의 야욕에 맞서기 위해서는 올바른 지식을 가진 ‘한 사람’ ‘한 사람’이 정말 중요하다"고 말했다. 김광원 기자

최장근 대구대 교수는 "일본의 우경화는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라면서 "일본의 야욕에 맞서기 위해서는 올바른 지식을 가진 ‘한 사람’ ‘한 사람’이 정말 중요하다"고 말했다. 김광원 기자


최장근 교수는 한국과 일본 모두 참고할 수 있도록 책을 펴낼 때 같은 내용을 한국어와 일본어로 나란히 싣는다. 김광원 기자

최장근 교수는 한국과 일본 모두 참고할 수 있도록 책을 펴낼 때 같은 내용을 한국어와 일본어로 나란히 싣는다. 김광원 기자


일본의 우경화와 함께 독도 관련 도발이 하루하루 거세지는 분위기다. 2005년부터 방위백서에 '독도는 일본 땅'을 명기하더니 2013년부터 지방 행사에 불과했던 '다케시마의 날' 행사에 차관급 인사를 파견해 일본 정부가 인정한 주요 행사로 승격시켰고, 2022년부터 일본의 모든 고등학교 사회 교과서에 '독도는 일본 고유영토'라는 주장이 담길 예정이다.

대구대 독도영토학연구소장인 최장근(일본어학) 교수는 최근 상황에 대해 “일본의 우경화에 브레이크를 걸 만한 요인이 보이지 않는다”고 분석했다. 최 교수는 “먼저 우리가 독도와 관련된 역사적, 국제법적 팩트와 현재의 상황을 올바로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다음 일본 내에 올바른 목소리를 내는 ‘한 사람’ ‘한 사람’을 만들어가는 동시에 국제사회와 UN에 독도를 바르게 알리는 것 외에 방법이 없다”는 의견을 밝혔다.

최 교수는 1994년 일본 쥬오대학 대학원에서 ‘독도는 한국 영토’라는 내용의 논문으로 석사 학위를 취득한 후 같은 대학에서 ‘간도문제’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이후 20여년 간 독도 연구에 매진해 10여권의 독도 관련 저술을 펴냈다. 지난해에는 2000년부터 2020년까지 한국연구재단이 인정한 우수학술지에 가장 많은 논문을 게재한 독도 연구자로 선정되기도 했다. 다음은 최 교수와의 일문일답.


-일본의 우경화와 독도 침탈 시도가 가속화하는 느낌이다. 전망은.

"아베가 일본을 급격하게 우경화시켰다. 초중고에서 검정교과서 사용을 의무화했다. 이전에는 교사에 따라 기미가요를 반대하기도 하고 다른 교과서를 쓰기도 했으나 지금은 허용이 안 된다. 일본 학생들은 이제 독도가 일본의 고유영토인데 한국이 불법 점령하고 있다는 식으로 배우고 있다. 이런 분위기는 앞으로도 크게 달라질 것 같지 않다. 일본의 우경화에 브레이크를 걸 만한 요인이 보이지 않는다."

-소위 '다케시마의 날' 제정 이후에 모든 것이 악화한 느낌이다. 이 행사가 하나의 분기점이 되었다고 보는 시각이 많다.

"2005년에 '다케시마의 날'을 제정했다. 처음에는 외무성이 오히려 반대했다. 한일관계의 악화를 우려한 까닭이었다. 시마네현이 소란을 일으킨 셈이다. 이들이 일본 정부를 압박했고, 급기야 정부에서 차관급 정무관을 매년 파견하기 시작했다."

-'다케시마의 날' 제정 이전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그때도 망언이 나왔지만 수위가 달랐다. 1965년 한일협정 이후 묻어두는 분위기였다."

-1965년 한일협정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가.

"우선 협정이 추진된 배경을 보자면, 미국 측의 강력한 의지로 한일 양국이 협정을 추진할 수밖에 없었다. 협상이 순조롭게 진행되다가 독도에서 탁 걸렸다. 일본은 현재의 독도에 문제가 있다고 걸고 넘어졌고, 한국은 '절대 의제로 삼을 수 없다'고 선을 그었다. 독도 때문에 협상이 더 이상 진정이 되지 않자 일본의 이세키 국장이 '독도를 폭파시키자'는 발언을 했을 정도다. 양국은 비밀 약속을 통해 독도는 현상유지하기도 했다. 결국 실효지배를 인정한 셈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그걸 이끌어냈다. 이후의 일본 총리들도 독도는 일본 땅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하지는 않았다. 국회의원들이 독도에 관련된 질문을 의례적으로 던졌지만 총리는 '평화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식으로 두루뭉술하게 넘어갔다. 야당 의원들도 명목상 질문을 던졌을 뿐이었다. 그러나 아베가 이런 분위기를 확 바꿨다."

-일본이 저렇게 강경하게 돌변한 이유가 무엇인가.

"여러 가지 상황이 겹쳤다. 1997년에 한국 측에서 독도에 접안시설을 만들었다. 역사적 진실과 상관없이 일본은 '현상유지' 밀약을 깼다고 봤다. 이후 항의가 시작됐다. 신한일어업협정도 빌미가 됐다. 이를 이해하려면 1982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해에 해양법(200해리 배타수역)이 개정됐다. 그리고 1996년에 국제해양법재판소가 개설됐다. 한국과 일본이 차례로 가입했는데 1997년 일본이 한일어업협정을 파기하고 새로운 협정을 요구했다. 당시 우리는 외환위기를 겪고 있었던 바, 일본의 전략적 행보라고 봐야 한다. 이때 일본이 요구하는 안을 적극 받아들여 신한일어업협정을 체결했다. 일본에게 훨씬 유리한 안이었다. 독도가 공동관리구역(중간수역)에 들어가면서 일본이 이를 확대해석했다. 어업협정이기 때문에 '영토'와는 관계없다. 일본의 전략적으로 확대해석했고 아베 정권은 좋은 빌미를 얻은 셈이었다."

-시모조 마사오란 인물이 이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에서 활동한 적도 있다고 들었다.

"1981년 한국으로 건너와 삼성종합연수원 강사 및 인천대학교 객원교수를 지냈다. 1998년 일본으로 돌아갔다. 이 사람이 처음 독도 문제에 관심을 가진 것은 신한일어업협정을 확인한 후였다. 그는 '독도는 일본땅'이라는 글을 '한국논단'이라는 잡지에 기고했다. 이런 기고를 일본 잡지에도 발표했다. 1999년 다쿠쇼쿠 대학 국제개발연구소 교수를 거쳐 2000년 다쿠쇼쿠 대학 국제개발학부 아시아태평양학과 교수로 자리를 잡으면서 독도 활동에 박차를 가했다. 그는 시마네현 공무원들을 움직였다. '독도는 일본 땅인데, 일본 정부가 아무 일도 안 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죽도의 날' 제정을 유도했다. 전형적인 일본인이다. 일본인들은 어찌 되었던 침략해서 정복했던 땅은 모두 자기 영토라고 생각한다. 보편적인 상식과 양심을 가진 이들은 '독특한 일본인'이다. 그는 일본인들의 성향을 자극해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켜나간 셈이다. 2006년 소위 '다케시마의 날' 행사를 시작했다. 그때부터 외무부에 계속 압력을 가했다. 동시에 시마네현이 독도 전시관을 만들고 교과서를 만들어 학교에 보급했다. 인터넷에도 독도 전시관을 열었다. 지금도 활동하고 있다. 아베는 시모조의 주장을 모두 수용했다. 문부성과 외무성을 시작으로 내각과 관방부도 서서히 그의 기조를 따르기 시작했다. 이들 모두 적극적으로 ‘독도는 일본 땅’이라고 목소리를 내고 있다. 한 사람의 힘으로 지금의 우경화가 가속화 했다. 과거로 회귀할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샌프란시스코 조약에서 독도를 명백하게 한국 땅이라고 했으면 일본의 억지도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한국인들이 많다.

"이전의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일본 패전 후 스카핀(SCAPIN, 연합국최고사령부 지령) 677호에서 제주도, 울릉도, 독도를 일본에서 분리했고, 스카핀 1033호에서는 독도에서 12해리까지를 한국의 영역으로 인정했다. 소위 맥아더 라인으로 12해리 안에는 일본 선박의 출입이 금지됐다. '최종적인 결정은 아니다'는 단서를 달았지만, 이 칙령으로 한국인이 이 섬에 들어갔다. 샌프란시스코조약에서 일본이 이 기조를 흔들려고 애썼다. 초안에서 1차에서 5차까지는 한국땅으로 명시했다가 6차에서 일본땅으로 썼다. 여기에 일본의 주일대사 윌리엄 시볼드의 역할이 있었다. 도쿄대 석사였고, 부인이 일본계였으나 오사카에서 변호사 생활을 했다. 대표적인 친일파였다. 그는 역사적으로 독도가 한국 땅이었던 적이 없었고 1905년 시마네현 고시를 강력한 국제법적 근거로 제시했다. 사실 일본이 독도를 자기 땅이라고 주장하는 유일한 근거가 시마네현고시다. 당시 미국을 비롯해 관계국들은 우리 역사를 몰랐고, 우리 역시 이를 제시하지 못했다. 상황상 일본에게 무척 유리했고, 일본은 로비 등을 통해 이런 상황을 적극 활용했다."

-당시 국제정세도 한국에 불리하게 돌아가지 않았나.

"당시는 전쟁 중이었다. 한반도가 공산화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이를테면 독도가 북한 땅이 된다면 남쪽을 향한 군사적 전진기지가 될 것이 뻔했다. 윌리엄 시볼드는 이런 측면도 고려했다. 그러나 이 협정에 미국만 관여한 것이 아니었다. 영국과 미국이 초안을 조율하고 11개국이 소속된 극동위원회가 최종 조율을 했다. 영국과 호주, 뉴질랜드가 '독도는 한국 땅'이라는 입장을 견지했다. 결국 '빼자'는 결론이 내려졌다. 조약은 이미 6년이나 끌고 있는 상황이었고, 독도 때문에 진도가 못 나가고 있었던 까닭이다. 문건이 남아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식으로 흘러갔을 가능성이 높다."

-일본은 샌프란시스코 조약에서 '미국이 독도를 일본 땅으로 인정했다'고 주장한다. 논리적인 반박이 필요해 보인다.

"문구에서 독도가 빠졌다는 것이 일본 땅이라는 의미가 될 수 없다. 일본은 줄곧 '미국이 인정했다'면서 미국이 모든 결정권을 쥐고 있는 것처럼 주장하지만, 미국은 관여된 48개국 중 한 나라다. 그리고 영미의 당시 입장은 '무인도는 유보하고 유인도는 신탁통치를 하자'는 것이었다. '독도는 일본 땅'이 확정된 적이 없다. 샌프란시스코 조약 최종안이 결정된 후의 상황도 중요하다. 1952년 한일 양국 모두 각자 국회로 가서 승인을 받아야 하는 절차가 남겨둔 상황이었다. 그해 1월에 이승만 대통령이 '평화선'을 선언했다. 우리나라 연안수역 보호를 목적으로 선언한 해양주권선이었다. 이 평화선을 넘는 일본 어선을 공격하기도 했고, 수백 명을 붙잡아 부산에 구금했다. 일본 국회에서 샌프란시스코 조약을 승인하기도 전이었다. 중요한 것은 국제사회의 반응이었다. 독도를 일본 땅으로 인정했다면 당연히 부정적인 반응이 터져 나왔을 것이다. 그러나 영미를 비롯해 어느 누구도 이 평화선과 이를 방어하는 국가적 행위에 대해 '위법이다'고 말하지 않았다. 독도 영유권을 인정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일본 국회에서의 상황도 들여다봐야 한다. 일본 국회의사록에 따르면 '독도는 일본 땅'이라고 명시하지 않는 부분에 대해 야당이 정부 여당을 공격했지만, 정부는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그러다 조약국장이 '일본영역참고도'를 '아무 말 없이' 국회에 뿌렸다가 다시 거두었다. 거기에는 독도가 한국 땅으로 명시되어 있다. 게다가 평화선 선언 이후 일본 국회가 조약을 비준했다. 평화선이 진짜 잘못된 것이었다면 끝까지 비준을 안 했을 것이다."

-앞으로의 과제는.

"신한일어업협정(1997)처럼 우리가 더 이상 양보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영토와 무관한 개념이지만 빌미를 내주었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다.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어야 한다."

-학자로서 어떤 작업을 펼쳐나갈 것인가.

"일본 학자와 연구회, 외교연구소 등에서 나온 저작들을 반박하는 작업을 활발하게 하겠다. 일본을 바꾸는 방법은 가장 정확한 대응밖에 없다. 그러면 일본 내에 정확한 지식을 가진 사람들이 더 생겨날 것이다. '한 사람'의 목소리가 크다. 올바른 지식을 가진 '한 사람' '한 사람'을 만들어가는 것이 학자로서의 의무라고 생각한다. 동시에 국제사회와 UN에 독도 문제를 바르게 알리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김광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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