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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수룩해 더 설렜던 첫사랑, 상파울루

입력
2021.10.14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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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7일 브라질 동남부 상파울루와 미나스 제라이스주의 몇몇 도시가 거대한 황사 바람에 뒤덮였다. 프루타우=AFP연합뉴스

지난달 27일 브라질 동남부 상파울루와 미나스 제라이스주의 몇몇 도시가 거대한 황사 바람에 뒤덮였다. 프루타우=AFP연합뉴스

처음으로 모래폭풍이란 걸 만난 건 이집트에서였다. 겨울방학은 ‘지중해 배낭여행’이라며 학생들이 몰리던 시절이었으니 내 딴에는 이때를 피한답시고 일부러 봄철에 찾은 터였다. 모래폭풍이 온다며 사람들이 술렁이는 듯하더니 어느 순간 하늘은 어두컴컴해지고 누렇게 일어난 모래구름이 온 도시를 감쌌다. 몰아치는 바람이며 숨쉬는 공기마다 먼지가 가득해, 창문을 꼭꼭 닫고 스카프로 눈코입을 둘둘 막아도 입안에서 버석버석 흙이 씹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얼마 전 뉴스에서 모래폭풍 소식을 봤을 땐 당연히 아랍지역의 소식이려니 했다. 다시 들어보니 영 상관없는 남미대륙, 브라질 상파울루의 이야기였다. 90년만에 온 최악의 가뭄에 상파울루 주위가 사막처럼 버쩍 마르면서 난데없는 모래폭풍이 도시의 높은 빌딩까지 꿀꺽 삼킨 것이다. 지구 반대쪽이라 우리와는 기후도 반대인 나라, 그만큼 멀고도 낯선 도시. 한 나라의 수도가 아니면서 가장 많은 이들에게 가장 자주 수도라는 오해를 받는 도시가 상파울루다.

나 역시 그랬다. 여행작가로 일을 시작한 첫 번째 취재 도시, 하필 도착한 날이 사람들은 죄다 공원이나 해변으로 놀러 간 주말이라 텅텅 빈 도심의 첫인상은 소문처럼 흉흉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다음 날 아침, 일상으로 돌아온 상파울루는 어제와는 다른 신세계였다. 이민자들이 일궈낸 도시답게 다양한 문화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기는 도심의 풍경은 도시적인 매력 그 자체였다. 골목마다 선물처럼 숨어 있는 카페나 바에서 여유로운 시간을 즐길 수 있었고, 거리마다 만나게 되는 유서 깊은 빌딩들은 저마다 오래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식탁에 차려지는 음식의 맛도 풍성했다. 커다란 고기구이 꼬챙이에서 끝없이 잘라주는 브라질 전통요리 슈하스코(churrasco)도, 가판에서 사 먹는 생과일 주스도 언제나 푸짐했다. 숙소에서 내놓는 공짜커피마저 눈이 휘둥그래질 만큼 근사했다. 무엇보다 달디단 구아바 잼과 짭조름한 치즈가 함께 올려진 피자라니. 선뜻 먹기를 망설이는 날 보며 주인은 “이게 바로 ‘로미오와 줄리엣’이야”라며 눈을 찡긋거렸다. 농담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정말로 브라질 사람들이 사랑하는 애피타이저이자 피자 토핑 이름이었다. 달콤하고 짭짤한 그 오묘한 조화에 처음으로 눈을 뜬 순간이었다.

그 가득한 설탕의 맛, 그 진한 커피의 맛에도 씁쓸한 이면은 있었다. 식민시대에 마구 퍼 가던 금광이 바닥난 후 1800년대부턴 설탕과 커피 재배가 주를 이뤘다. 모두 이곳에서 먹고살 식량이 아니라 다른 대륙, 다른 나라 사람의 취향에 맞춘 플랜테이션 산업이었다. 이렇게 키운 설탕과 커피는 상파울루주(洲)에 있는 산투스 항을 통해 실려 갔는데, 우리에게도 알려진 커피품종 산투스(Santos)가 바로 이 항구 이름에서 나왔다.

어쩌면 내게는 첫사랑과도 같은 도시, 처음이라 낯설어서 설렜고 잘 몰라서 더 열심히 취재했던 도시가 아니었을까 싶다. 코로나19를 겪은 지난 2년이 잔잔한 물에 큰 출렁임을 만든 돌덩이였던 이들이 유난히 많다. 하던 일을 접고, 다른 일을 찾는 이들, 당장 막막함에 뚝뚝 흐른 눈물도 보았다. 부디 처음이라 낯설고 두려워 날뛰는 심장박동이 새로운 세계를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되기를, 상파울루에 처음 내렸던 그 마음으로 함께 빌어 본다.


전혜진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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