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영? 첫 장편소설 '1차원이 되고 싶어'
2000년대 배경으로 10대 퀴어 성장담 그려
그 시절에 대해 쓰기 위해서는 각오가 좀 필요하다. 순수한 낭만이 가득했던 철없는 나날로 회상하기엔, 실은 그 어느 때보다 잔인하고 또 가혹했던 순간이었다는 걸, 그때를 통과해온 사람이라면 모르지 않기 때문이다. ‘호밀밭의 파수꾼’이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 불멸의 성장소설로 남겨질 수 있었던 이유 역시 그 시절의 잔인함을 모른 체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박상영 작가의 첫 장편소설 ‘1차원이 되고 싶어’가 당시로 거슬러 올라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스릴러의 형식을 띨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당연할 것이다. 2016년 문학동네 신인상으로 등단한 후 2019년 젊은작가상 대상 수상, 2021년 신동엽문학상을 수상하며 한국 퀴어 문학의 계보를 새로 써나가던 작가는 10대 퀴어 청소년의 삶을 그린 첫 장편소설을 통해 바로 그 ‘박상영 문학’의 기원을 되짚는다.
소설의 배경은 2000년대 초반 지방의 한 중소도시인 D시다. “학력이 더 나은 삶을 보장해줄 거라는 믿음”이 유효했고, 덕분에 외고나 과고 같은 특목고 열풍이 불던 때였다. 주인공인 ‘나’는 D시를 벗어나야 한다는 목표로 특목고 입시 준비반에 다니는 10대다. “성적도 인지도도 평판도 나쁘지 않은, 맹물에 겨우 시럽 한 방울 탄 것 같은” 인물이지만, 사실 이러한 ‘평범함’은 모두 가장해낸 것이다.
나를 ‘평범한 10대’로 만들지 못하는 요소는 이런 것이다. 같은 학교에 다니는 친구들 모두가 신세계 아파트에 살 때 혼자 다른 학군에 속하는 궁전 아파트에 산다는 사실. 모두가 월드컵 4강 신화에 열광하며 ‘오 필승 코리아’를 부를 때, 축구에도 국가에도 관심이 없어 체육시간에도 구석에서 책을 읽는다는 사실. 그리고 내가 남자를 좋아하는 남자라는 사실.
하지만 아무리 공고하게 ‘평범의 벽’을 쌓아 올려도 누군가는 벽을 뚫고 내 세계 안으로 침투해 들어온다. 그 순간 침입자는 가장 특별하고 소중한 존재가 된다. 주인공에게는 ‘윤도’와 ‘무늬’가 바로 그런 존재다. 진짜 정체성을 숨기기 위해 쓴 모범생의 가면을 윤도와 무늬는 거침없이 벗겨낸다. 그렇게 맨 얼굴로 마주하게 된 윤도와 무늬는 각각 사랑과 우정의 형태로 내게 의미화된다.
“나는 나의 부모와 나의 집, 나의 성향과 취향, 나의 말 못 할 비밀과 우울, 내가 혼자임을 버티는 방식, 그러니까 나 자신의 모든 것이 부끄러웠다. 그래서 안간힘을 다해 나 자신을 감추려 해왔던 것이고. 윤도는 별다른 말 없이 내 입에 목캔디를 하나 넣어주었다. 그렇게 나의 비밀 중 하나를 맥없이 들켜버렸다. 그래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그것은 내게 작은 위안이 되어 주었다."
그러나 이 사랑과 우정은 영원히 안온한 자리에 머무를 수 없다. 내가 윤도에 대한 감정을 키워가는 것과 달리 윤도는 점점 거칠어지고, 나를 밀어냈다가 또 끌어안는다. 무늬 역시 자신을 둘러싼 억압과 싸우느라 버겁다. 이런 상황에서 누군가 나의 ‘비밀’을 알고 있다며 협박해온다.
소설은 어떻게든 그 시절을 통과하기 위해 ‘비밀’을 호수 저 깊은 곳으로 밀어버릴 수밖에 없었던 나의 선택을 그린다. 부동산 가격으로 구획되는 삶의 수준, IMF의 지난한 여파, 숨 막히는 대입 경쟁, 거짓말과 위선, 가난과 폭력으로 점철된 세계에서 나를 지키려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는 변호와 함께.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흐른 뒤, D시 호수 바닥에 가라앉아 있던 비밀이 백골 변사체의 모습으로 떠오르는 장면에서 소설은 시작한다. 그렇게 과거와 다시 마주하는 일은 고통스럽지만, 그 고통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는 사실 역시 부정할 수 없다. 소설이 스릴러의 외피를 쓸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결국 “성장이라는 것 자체가 지독하고도 아름다운 스릴러”이기 때문이다.
400쪽이 넘는 묵직한 소설을 든든히 받치는 기둥은 세밀하게 복원한 당시의 대중문화 풍경이다. 파나소닉 휴대용 시디 플레이어에서 재생되던 넬과 자우림, 에이브릴 라빈에서 콜드 플레이로 이어지는 음악 목록과 ‘하울의 움직이는 성’ 같은 영화, ‘키노’ 같은 잡지는 독자를 단숨에 2000년대로 데려간다. 무엇보다, 10대 시절이 그저 잠시 앓는 열병처럼 빨리 지나가기만을 바랐던 기억이 있는 이들이라면 이 소설은 저마다의 앓았던 흔적으로 읽힐 것이다. 그 흉진 자리를 가만히 쓸어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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