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스피스 의사의 깨달음 담은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한 호스피스 의사가 있다. 시사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저널리스트였다가 사람들을 유도하고 조종하는 프로그램 제작 과정에 회의를 느껴 뒤늦게 의대에 진학했다. 생명을 구하려 의사가 됐지만 환자를 사람이 아닌 고쳐야 할 장기로 대하는 차가운 의료 현실을 직면하고, 환자 중심 의술을 펼칠 수 있는 완화의료(호스피스)를 전공으로 택했다. 암담한 마지막 순간에도 기쁨을 찾는 환자들을 통해 삶을 새롭게 배웠다. 그러나 막상 아버지가 암 진단을 받은 후 모든 것은 뒤죽박죽되고 만다. 아버지를 떠나보낸 후엔 후회 없는 삶의 태도를 깨닫는다.
영국의 공중보건의이자 완화의료 전문가 레이첼 클라크가 쓴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는 삶과 죽음, 아름다운 이별을 말하는 책이다. 의사인 저자가 환자들의 마지막을 지켜본 사유와 아버지를 힘겹게 보낸 경험을 통해 존엄한 죽음을 이야기하는 점에서 2015년 국내에 번역·출간돼 화제가 된 아툴 가완디 하버드대 의대 교수의 '어떻게 죽을 것인가'(부키 발행)와 많이 닮았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 출간 이후 국내에도 '인간다운 죽음'을 논하는 책이 잇따라 소개됐지만 의료의 중심에 사람을 두지 않고 생명의 기계적 연장에만 몰두하는 현대의학의 현실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전반부는 의료인으로서 경험한 죽음을 다루는 의료계의 냉정하고 차가운 방식에 대한 문제 제기다. 가령 저자는 회복 불가능한 질병으로 죽어 가는 환자들에게 심폐소생술(CPR)은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잔인한 과정이라고 주장한다. CPR로 환자의 생명을 영웅적으로 구하는 의학 드라마는 터무니없이 과장됐다는 지적이다.
후반부는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호스피스 환자들과의 인연을 담았다. 죽음을 둘러싼 끔찍한 상상을 죽어가는 환자들에게 투영했던 저자와 달리, 환자들은 죽음으로 향하는 길목에서도 충만한 삶을 찾고자 했다.
삶의 마지막 단계에서 이들이 원한 것은 소박한 일상이었다. 급성 장폐색으로 응급실에 들어와 호스피스로 이송돼 온 도로시는 죽음을 목전에 뒀지만 20년 동안 동네 친구들과 해 온 카드게임을 하기 위해 깔끔하게 단장하고 외출길에 나선다. 60대인 테레사는 생애 마지막 해를 시와 함께 보내며 "그냥 살아 있다는 순수한 즐거움에 감사하고 있다"고 말한다. 유방암이 악화된 20대 초반의 엘리는 약혼자인 제임스와 병원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그리고 예식 다음 날 남편의 품에 안겨 숨을 거둔다. 대장암이 간으로 전이된 저자의 아버지도 마찬가지다. 아버지는 화학요법을 포기한 후 어머니와 함께 젊은 시절 데이트했던 해변으로, 결혼식을 올린 교회로 여행을 다닌다. 저자는 "아버지는 수척해지고 기력이 떨어졌지만 기분만큼은 늘 들떠 있었다"고 전한다.
가완디의 책이 '좋은 죽음'의 당위성과 의료계의 의식 변화에 방점을 찍고 있다면 이 책은 죽음을 통해 삶을 조망하는 저자의 성장담에 가깝다. 저자는 책 말미에 '죽음의 문턱을 넘기 전까지는 여전히 살아 있고, 그저 묵묵히 삶을 살아가야 한다'던 아버지의 당부를 되새기며 "아버지의 나날과 환자들을 위해 죽음과 삶이 공존하도록 열과 성을 다하고 있다"는 근황을 전한다.
'삶에게(Dear Life)'라는 원제에서 느껴지듯 눈시울을 적시며 책장을 넘기다 보면 어느덧 삶에 대한 태도를 되돌아보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사랑하는 이를 떠나 보내야 하는, 또는 떠나야 하는 순간에 큰 위로와 지혜가 될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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