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카고대 첫 여성 물리학과장 이어?
한국 여성학자 중 최초 미국물리학회장
"치열한 고민과 토론이 연구자의 자산"
빛의 입자적 성질을 증명한 아서 콤프턴, 세계 최초의 핵반응로를 개발해 원자력 시대를 연 엔리코 페르미, 우주를 구성하는 가장 근본적인 입자 '쿼크(Quark)'를 발견한 제롬 아이작 프리드먼은 뛰어난 업적으로 후세에까지 이름을 날리고 있는 물리학자들이다.
이들은 모두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했는데, 또 하나의 공통분모가 있다. 역대 미국물리학회장 출신이란 점이다. 122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미국물리학회 회장은 그동안 수많은 석학들이 거쳐간 자리다. '원자폭탄의 아버지' 로버트 오펜하이머, 무한대의 중력이 작용하는 우주의 특이점을 발견해 '블랙홀'로 명명한 존 아치볼드 휠러도 물리학회장을 지냈다.
미국물리학회가 지난달 8일(현지시간) 차기 부회장을 발표하자 전 세계 물리학자들의 눈길이 일제히 쏠렸다. 차기 부회장은 김영기(59) 시카고대 물리학과 교수. 한국인 여성 학자 중 첫 부회장이 탄생했다. 차기 부회장은 2년 뒤 회장을 이어받는 방식이라 김 교수는 2024년 1월부터 미국물리학회 회장을 예약했다. 같은 달 24일 한국일보와의 국제전화 인터뷰에서 김 교수는 "얼떨떨하고 중책을 맡게 돼 책임감이 앞선다"고 소감을 전했다.
물리학계 새 역사 쓰는 한국인 학자
미국물리학회는 3년 후에 학회를 대표할 회장을 뽑기 위해 매년 추천위원회를 구성한다. 추천위원들도 물리학자들 중에서 선출한다. 위원회가 논의를 거쳐 회장 최종 후보자 2명을 지목해야 투표가 시작된다. 김 교수는 올해 초 후보자가 됐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는 "꼭 맡아 달라는 얘기를 듣고 '왜 하필 나일까', '내가 할 수 있을까' 걱정도 됐지만 다른 학자들이 인정해준다는 점이 고맙기도 해 고민 끝에 수락했다"고 말했다.
투표는 5만5,000여 명의 회원에게 이메일로 알리고 몇 달간 회신을 받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미국물리학회 회원은 25% 정도가 미국 이외 국가에 거주한다. 한국에도 상당수의 회원이 있다. 김 교수의 경우 미국 시민권자라 외국인 회원은 아니다. 그는 "연륜과 학식이 뛰어난 분들이 회장을 맡아 아마도 최근 20, 30년을 따지면 내가 최연소 같다"며 "젊은 학자들과 시니어 학자들 사이에서 중심을 잡으며 물리학계의 구석구석을 살피겠다"고 밝혔다.
김 교수는 시카고대 물리학과 학과장을 맡고 있다. 올해로 6년째다. 역대 졸업생과 교수진이 노벨물리학상 수십 개를 합작한 어마어마한 시카고대 물리학과에서 여성 최초의 학과장이다. 물론 한국인 물리학자로서도 처음인데 김 교수는 '학과장' 얘기를 꺼내자 수화기 너머에서 고개를 저었다. "삼 년씩 두 번 선임됐는데, 드디어 올해로 끝난다. 보람 있는 일도 많지만 힘든 일도 많았다. 이제 새로운 학과장이 새로운 마음으로 일할 때가 온 것 같다."
'수학의 여왕'에서 '충돌의 여왕'으로
김 교수는 1962년 경북 경산군 하양면에서 태어났다. 고려대 물리학과를 졸업한 뒤 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마치고 미국 로체스터대에서 물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UC버클리 교수를 거쳐 2003년부터 현재까지 시카고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어릴 적부터 물리학자의 꿈을 꾼 것은 아니다. 김 교수는 "특히 대학 1, 2학년 때는 공부하는 스타일이 아니었고 탈춤과 사상교육에 흠뻑 빠졌었다"고 회상했다. 학창 시절 연애 경험에 대한 질문에는 짧지만 명확하게 답했다. "많이 해봤다."
수학분야에서 뛰어났던 김 교수의 고교 시절 별명은 '수학의 여왕'이다. 대학에서 전공을 물리학으로 선택한 것도 수학의 영향이 적지 않다. 수학은 '물리학의 언어'로 불린다. 김 교수는 "자연의 법칙을 연구하고 싶었고 수학도 좋아하니까 물리학이 내게 맞는 학문 같았다"며 "처음부터 재미있었고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수학의 여왕은 미국에서 본의 아니게 '충돌의 여왕'이 됐다. 2000년 미국 과학전문지 디스커버가 21세기를 맞아 세계 과학계를 주도할 40세 미만 과학자 20명 중 1명으로 김 교수를 선정하며 붙인 별명이다. 김 교수의 전공 분야는 우주를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입자들의 상호작용을 통해 자연현상의 본질을 탐구하는 입자물리학이다. 그는 "입자물리학은 전자와 양전자, 양성자와 반양성자, 혹은 양성자와 양성자를 충돌시키는 실험이 핵심"이라며 "누가 지었는지 모르지만 마음에 드는 별명이라 고맙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2004년부터 2년간 페르미국립가속기연구소(페르미랩)에서 충돌실험을 위한 700명 규모의 국제 연구자그룹의 공동대표를 맡았다. 이후 2013년까지 연구소 부소장을 맡아 충돌의 여왕으로서 명성을 이어갔다. 페르미랩은 한국이 낳은 세계적 물리학자 고 이휘소 박사가 1970년대 이론물리부장을 지낸 연구소다.
KSEA 차기 회장, 한국 과학자들과 가교 역할도
김 교수는 30년 넘게 미국에서 살았고 미국인 남편도 시카고대 교수다. 그의 주무대는 미국이지만 고국에 대한 애정으로 카이스트를 비롯해 한국의 대학 강단에도 종종 섰다. 국내 연구기관들의 자문에도 기꺼이 응했는데, 얼마 전 재미한인과학기술자협회(KSEA) 차기 회장으로 선출돼 한국과 더 가까워질 기회가 생겼다.
김 교수는 "내년 7월부터 1년간 회장을 맡아 한국 과총 등과 다양한 협력 사업을 펼칠 계획이다. 한국의 젊은 과학자들과 함께 해보고 싶은 게 참 많다"면서 "현대과학은 많은 이들이 서로 아이디어를 내 소통하고 토론하는 과정에서 발전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젊은 과학자들은 연구 성과나 자신의 미래에 대한 고민이 많을 텐데, 본인이 연구가 재미있다면 두려워 말고 계속 나아갔으면 좋겠다. 그 치열한 고민이 하루하루 쌓이면 연구자의 소중한 자산이 될 수 있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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