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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동, 래퍼, 성추행 그리고 아버지

입력
2021.10.02 00:00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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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군 성추행 피해자 고(故) 이 모 중사 부친이 지난달 28일 서울 마포구 군인권센터에서 열린 공군 성추행 피해자 사망사건 수사결과 비판 기자회견에서 딸의 사진을 들고 군의 수사를 비판하고 있다. 연합뉴스

공군 성추행 피해자 고(故) 이 모 중사 부친이 지난달 28일 서울 마포구 군인권센터에서 열린 공군 성추행 피해자 사망사건 수사결과 비판 기자회견에서 딸의 사진을 들고 군의 수사를 비판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번 주, 세 명의 아버지를 보았다. 한 아버지는 아들이 회사로부터 50억 원의 퇴직금을 받은 이유를 설명하느라 분주했고 다른 아버지는 술에 취해 경찰을 때린 아들이 체포되자 "사건 수사에 그 어떤 영향력도 행사하지 않겠다"고 자못 비장하게 선언했다. 그 사이 또 다른 아버지는 상관에게 성추행당하고 사망한 딸의 사건이 묻히는 것을 막기 위해 영정 사진을 들고 카메라 앞에 섰다.

이 모든 행위의 동력은 부정(父情)이었을 것이다. 단지 앞의 두 아버지는 국회의원이고, 세 번째 아버지는 평범한 소시민이었을 뿐. 그 차이 하나로 그들의 딸과 아들이 사회에서 할 수 있었던 행동, 그리고 부모가 택할 수 있는 대처의 범위는 이토록 달라졌다.

이 씁쓸한 대비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최순실 사태 후 가까운 몇 년만 살펴도 조국에서 박형준, 김성태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유력 인사와 그 아들 딸들이 다양한 방면의 특혜 의혹과 함께 떠올랐다. 그나마 이름이 눈에 띈 케이스는 더러 처벌을 받기도 했지만 더 일상적이고 광범위한 비리는 대개 소리 없이 흩어졌다.

한편 어떤 부모들은 세상을 뜬 자식들의 사진과 피켓을 든 채 거리로 나서야 했다. 산재 피해자, 불법파견 노동자, 성폭력 피해자…이유는 달랐으나 목적은 같았다. 자녀가 사망한 경위와 책임 소재를 밝혀내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같은 비극이 발생하지 않도록 막는 것이었다.

그러나 전자든 후자든, 이 사건들은 대개 정치적 공격거리로 사용되었다. 정치인들은 사건 속 부모와 자녀들의 이름을 탄환처럼 쏘며 정적의 행실을 지적하고 상대 당의 무능을 비난하는 데 열을 올렸으나 정작 문제의 뿌리를 뽑기 위한 논의는 지지부진했다. 권력자의 자녀 관련 비리는 꽃피듯 색깔만 바꾸어 계절마다 돌아왔고, 같은 시간 평범한 어느 부모의 아들 딸들은 낙엽처럼 스러져 갔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는 이가 발생하는 것은 필연적이라 하더라도 부모의 부와 권력이 그 자녀가 가진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넓히거나 좁힌다면 그건 사회의 다른 축인 민주주의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특히 이 경우가 더 나쁜 것은 룰을 깬 이들이 시스템 속에 교묘히 몸을 숨긴다는 점이다.

최근의 여러 의혹 중에서도 곽상도 의원의 아들이 받은 50억 원에 또래 회사원들이 특히 분노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어떤 계산법으로도 나올 수 없는 비현실적인 금액이 ‘퇴직금’이며 ‘산재 위로금’이라는 탈을 뒤집어쓰고 있는 까닭이다. 산재 사망자의 유가족이 수년씩 투쟁해도 단 1억 원의 보상금조차 받기 어렵다는 현실을 감안하면 이명과 현기증을 이유로 45억 원의 ‘위로금’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산재 피해자들을 향한 조롱에 가깝다.

선거가 가까워지면서 ‘공정’과 ‘평등’이라는 말의 제철이 돌아왔다. 정치인이라면 누구나 입에 올리는 말이지만, 그 무게를 아는 이들은 없는 듯하다. 반세기를 넘는 세월 동안 한국 사회는 모든 방면에서 변화해 왔다. 그러나 누군가 어떤 부모의 자식이라는 것을 마패처럼 내밀고, 반면 어떤 아들과 딸의 죽음이 부모의 가슴에 한으로 맺히는 일들만은 끊이지 않았다. 이 굴레를 작심하고 끊기 전까지, 공정과 평등이란 구호는 누가 외치든 기만에 그칠 뿐이다.



유정아 작가·'시시한 사람이면 어때서'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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