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년 집권 마친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평범한 '재킷 패션 외교'...튀지 않는 정치 위해
과학자 출신으로 신중한 성품...'메르켈른' 신조어도
남성 위주 세계 정상들에 '메르켈 리더십' 발휘해

독일 총선을 하루 앞둔 지난달 25일 앙겔라 메르켈(왼쪽) 총리가 기독민주당(CDU)·기독사회당(CSU) 연합 총리 후보인 아르민 라셰트(오른쪽)의 지역구 아헨에서 지원 유세를 벌이고 있다. 메르켈 총리는 이번 총선을 끝으로 16년의 집권을 마치고 정계를 은퇴한다. EPA 연합뉴스
까도까도 나오는 '대장동 개발사업'을 둘러싼 논란은 현재 대한민국을 뒤집어 놓고 있다. 거물급 정치인 및 법조계 권력자들의 이름이 거론될 때마다 국민들의 분노는 하늘을 찌르는 상황이다. 대선을 비롯해 각종 선거철만 되면 터져 나오는 권력자들의 비리와 부패 스캔들은 대한민국의 현주소이자 고질병이다.
이런 와중에 자국 국민들뿐만 아니라 전 세계인들에게 박수 받으며 퇴임하는 정치인이 있다. 지난 16년 동안 세계 정상들과 국제 현안을 이끌었던 인물, 바로 앙겔라 메르켈(67) 독일 총리다.
동독 출신에 여성이자 과학자로서 드문 이력을 가진 그. 독특한 이력이지만 특유의 청렴한 성품이 '정치 장수 비결'임에 틀림없다. 정계 입문 후 28년 동안 각종 비리 사건에 연루된 적이 없을뿐더러 친인척들 이름도 거론되지 않았다. 우리나라 정치 현실과는 달라도 너무 다른 풍경이다.
그래서인지 '메르켈 정치'가 남긴 유산은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소박한 '재킷 패션'으로 튀지 않는 외교를 펼치고, 차분한 설득으로 남성 위주의 세계 정상들을 좌지우지하던 그의 모습은 두고두고 회자될 것이다.
16년 동안 고수한 '재킷 패션'...나름의 전략이었다

지난 여름 영국 콘월에서 열린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에서 앙겔라 메르켈(맨 오른쪽) 독일 총리가 붉은색 재킷을 입고 참석해 사진 촬영을 하고 있다. 영국 경제지 파이낸셜타임스는 남성 위주의 세계 정상들 속에 선 메르켈 총리를 두고 '고속도로의 외로운 양귀비처럼 붉은색 재킷을 입고 있다'고 표현했다. AFP 연합뉴스
소프트 파워 드레싱
영국 경제지 파이낸셜타임스는 퇴임한 메르켈 전 총리의 옷차림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메르켈 총리의 스타일은 오로지 다채로운 색상의 재킷뿐이었다. 평범하면서 튀지 않는 패션으로 어디서든 문제가 되지 않도록 나름의 스타일을 지켰다. 이러한 '재킷 패션'은 메르켈 총리 스스로 창조했고, 이를 자신의 브랜드로 만들었다.
액세서리도 최대한 절제했다. 간혹 목걸이를 착용하긴 했지만 반짝이는 보석류는 단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다. 단지 검정 가죽의 손목시계와 웨지 로퍼가 전부였다.
평범하디 평범한 재킷들은 16년 동안 그와 함께했다. 특별할 것 없는 중년 부인 같은 패션에 생명을 불어넣고 싶어서였을까. 2012년 네덜란드의 그래픽 디자이너 노르트예 반 에켈렌은 메르켈 총리의 재킷을 컬러 차트로 엮어 '판톤 메르켈'이라는 예술 작품을 선보이기도 했다.

2012년 네덜란드 그래픽 디자이너 노르트예 반 에켈렌의 작품 '판톤 메르켈'. 영국 가디언 홈페이지 캡처
오죽하면 테리사 메이 전 영국 총리는 BBC의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메르켈 전 총리가 난파선에 있다면, 그의 사치품은 패션매거진 보그의 평생 구독이 될 것"이라고 말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메르켈 전 총리의 패션은 단순한 선택이 아니다. 그의 성격만큼 신중하게 결정된 일종의 '룰'이었다. 그의 재킷 패션은 여성들이 정치에 직면하는 이중잣대에 대한 도전이었다.
메르켈 전 총리는 한 독일 매거진과 인터뷰에서 "남자가 100일 연속으로 짙은 파란색 정장을 입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지만, 만약 내가 2주에 네 번 같은 재킷을 입는다면 시민들의 편지로 이어진다"고 말했다.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 참석차 영국을 방문 중인 문재인 대통령이 6월 12일 영국 콘월 카비스베이 양자회담장에서 메르켈 독일 총리와 환하게 웃으며 대화하고 있다. 콘월=연합뉴스
그는 자신의 스타일을 함부르크의 한 작은 브랜드숍에서 완성했다. 이 브랜드는 보석 톤의 클래식한 맞춤 의류를 전문으로 한다. 정치적 스타일 역시 소박하게 자기 식으로 만든 셈이다. 그가 동네 슈퍼마켓을 방문하고 총리 공관 대신 아파트에서 생활하는 것처럼.
메르켈 전 총리의 스타일은 전문가들에게 대체로 좋은 평가를 받았다. 독일의 패션작가 실크 비체트는 "독일 정치에서 유행하는 드레스 코드는 그렇게 긍정적으로 보이지 않는다"며 "너무 멋있으면 사람들은 그것을 믿지 않는다"고 말했다.
패션매거진 독일 보그의 마리아 훈스티그 이사도 "독일에서는 외모와 패션을 신경 쓸 경우 그 사람을 덜 진지하게 보이게 한다는 생각이 여전히 있다"며 "(이런) 스타일에 대한 인식을 뒤흔들 젊은 정치인은 단 한 명도 없다"고 강조했다.
오바마 대통령이 퇴임 전 메르켈 총리를 찾아간 이유는?

앙겔라 메르켈(왼쪽) 독일 총리가 2011년 독일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2016년 11월 말. 미국의 45대 대통령으로 도널드 트럼프가 선출된 이후 퇴임을 준비하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독일 베를린의 한 호텔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만난 사람은 그 이듬해 독일 총선거 이후 연임하지 않기로 결정한 마르켈 총리. 두 사람은 3시간 동안 깊은 대화를 나눴다. 오바마 대통령은 무슨 이유로 메르켈 총리를 찾은 것일까.
오바마 대통령은 메르켈 총리를 설득하러 간 것이었다. 그는 총리직을 더 이상 연임하지 않기로 한 메르켈 총리에게 이를 재고해 줄 것을 부탁했다.
메르켈 총리는 "오직 한 사람만이 자유주의 세계 질서를 유지할 수 있다"는 오바마 대통령의 설득에 생각을 바꿨다고 한다. 오바마는 지정학적 감각과는 멀어질 트럼프 체제 속 미국과 더 나아가 세계 질서를 걱정했다.

2018년 6월 캐나다에서 열린 주요 7개국(G7) 정상회담에서 메르켈(가운데) 독일 총리가 미국의 고율 관세와 이란 핵협의 탈퇴 등을 두고 도널드 트럼프(맨 오른쪽) 미국 대통령과 대치하고 있다. 독일 연방정부 제공
오바마 대통령의 선견지명은 적중했다. 메르켈 총리는 '파리기후변화협약'을 지키려고 노력함과 동시에 트럼프 행정부가 이를 반대하며 탈퇴했을 때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 대한 지정학적 압력을 유지했다.
이 일화는 최근 맷 큐보트룹 코번트리대 응용정치학 석좌교수가 호주의 비영리매체 컨버세이션(The Conversation) 기고문에서 밝힌 내용이다. 그는 학자로 활동하기 전 영국 내무부 총기범죄과장 등을 지냈고, 오바마 대통령의 아프리카 특사팀의 일원으로도 일했다. 저서 '앙겔라 메르켈: 유럽의 가장 영향력 있는 리더(Angela Merkel: Europe's Most Influential Leader)'를 폈다.
큐보트룹 교수는 '메르켈의 유산'으로 "자유주의 세계 질서에 대한 관리"라고 말한다. 즉 메르켈 총리를 실용적인 외국 정치가로 평했다.
그러면서 메르켈 총리의 멘토였던 헬무트 콜,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총리가 주로 자국내 정책으로 기억되는 반면, 메르켈 총리는 '외교 정책 정치인'으로 불린다고 봤다. 콜 전 총리는 독일 통일을 주도했고, 슈뢰더 전 총리는 복지국가를 개혁했다. 메르켈 총리가 물러난 지금, 그의 유산은 국제적인 것이라는 얘기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지난해 12월 베를린 총리실에서 16개 주 주지사들과 화상회의를 한 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응책에 대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독일은 당시 비필수 업종의 상점과 학교 문을 닫는 등 봉쇄 조치를 강화했다. AFP 연합뉴스
이는 메르켈 총리의 성품과도 연결돼 있다고 큐보트룹 교수는 전했다. 양자물리학 박사로 과학자 출신인 메르켈 총리는 위기가 닥쳤을 때 '행동파' 지도자들과 달리 신중한 결정을 내리는 '생각파'였다.
이러한 '메르켈 정치'는 양날의 검이었다. 어떤 조치가 취해지기 전까지 사실과 근거를 바탕으로 결정을 심사숙고하는 편인데, 이 때문에 '메르켈른(Merkeln)'이라는 단어까지 생겼다. 행동을 취하지 전 숙고한다는 의미다.
그만큼 결정이 늦어지기 때문에 '미루기의 달인'이라는 별명도 따라다녔다.
그러나 큐보트룹 교수는 "메르켈 총리는 포퓰리즘 시대의 진중한 리더십으로 협력하면서 성과를 얻었다"며 "정치가 논쟁에서 승리하기보다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줬다"고 회고했다.
세계인 신뢰 얻은 메르켈...독일 이미지를 바꾸다

지난달 26일 퇴임을 앞둔 앙겔라 메르켈(왼쪽) 독일 총리가 같은달 16일 프랑스 파리 엘리제궁을 방문해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의 영접을 받고 있다. AP 뉴시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에 비해 더 많은 신뢰를 얻고 있다."
최근 미국 CNBC 방송은 퇴임을 앞둔 메르켈 총리에 대한 미 여론조사 전문업체 퓨리서치센터의 조사 결과에 주목했다.
퓨리서치센터에 따르면 2~5월까지 전 세계 16개 선진국의 1만7,000여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77%가 "메르켈 총리가 세계 문제에 대해 옳은 일을 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전체 응답자의 79%는 독일을 호의적으로 본다고 했다.
퓨리서치센터는 "메르켈 총리는 취임 이후 많은 국가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조사한 대부분의 국가에서 독일 총리에 대한 신뢰가 이보다 더 높았던 적이 없었다"고 분석했다.
또한 그는 프랑스, 미국, 러시아, 중국 등 세계 5개 나라 정상들 가운데 가장 높은 지지를 받았다.

지난달 1일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팬데믹·에피데믹 정보를 위한 세계보건기구(WHO) 허브' 창립 행사에서 테워드로스 아드하놈 거브러여수스 WHO 사무총장(왼쪽)이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에게 공로 메달을 걸어주고 있다. EPA 연합뉴스
이러한 결과는 자연스레 독일을 긍정적으로 보는 이들이 늘어나게 했다. 퓨리서치센터가 독일을 제외한 유럽, 북미, 아시아 태평양 지역 16개국 국민들의 79%가 독일에 대해 호감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단 16%만이 독일에 비호감을 갖고 있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위기 속 메르켈 총리의 관리 능력도 조사에 좋은 영향을 미쳤다. 전체의 66%는 독일이 코로나19 상황을 잘 대처했다고 답했으며, 다른 나라와 비교했을 때 선전하고 있다고 했다.
이는 독일의 코로나19 대응 능력이 세계보건기구(WHO)나 중국, EU, 미국보다 더 긍정적으로 평가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퓨리서치센터는 "독일이 코로나19 대처를 잘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독일에 대해 호의적인 시각이 있고, 메르켈 총리를 신뢰하는 경향이 훨씬 크다"고 해석했다.
하지만 메르켈 총리에 대한 긍정 평가만 있는 건 아니었다. 그가 10년 전 유로존의 금융 위기부터 2015년 난민 문제, 코로나19 대유행에 이르기까지 유럽이 여러 위기를 헤쳐 나가는 데 도움을 줬지만, 자국 이기주의는 버리지 못했다는 평가도 있다.

2012년 10월 그리스 아테네에서 시민들이 그리스 최대 채권국인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 방문을 항의하며 정부의 긴축정책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AP 연합뉴스
그리스는 메르켈 전 총리를 인정하지 않는 국가 중 하나다. 퓨리서치센터에 따르면 그리스는 응답자의 30%만이 메르켈 전 총리가 국제 문제에 옳은 일을 할 것이라고 답했으며, 32%가 독일에 호의적인 견해를 가졌다.
사실 메르켈 총리는 일부 어려운 결정을 회피했다는 비난을 받아왔다. 기후 변화와 독일의 사회 기반 시설 지출의 필요성 같은 사안들을 다루는 데 있어 유로존의 다른 나라들을 희생시키면서 독일의 경제적 복지를 먼저 챙기려 했다는 비판이었다.
그리스는 10년 전 국제적으로 구제 금융을 하루빨리 받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메르켈 총리는 그리스가 구제 금융을 받는 조건으로 아테네에 엄격한 긴축정책을 시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때문에 그리스 사람들은 지금도 독일과 메르켈 총리에 대해 반감이 크다. 이번 조사에서도 그리스 응답자의 무려 86%가 "유럽의 다른 나라와 비교했을 때 독일이 EU에서 너무 많은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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