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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그 후, 부모가 남은 자리

입력
2021.09.23 22:00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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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시 유성구 전민동 서포 김만중 문학비 ⓒ김준현

대전시 유성구 전민동 서포 김만중 문학비 ⓒ김준현


“언니, 이쪽으로 와 봐, 여기도 길이 있어.” 까르르 웃는 아이들 소리가 오랜만에 동네에서 들렸다. 은퇴한 부부가 많이 사는 전원주택단지라, 평상시에는 새소리 벌레소리에 아주 가끔 컹컹 짖는 개소리가 들릴 뿐인데. 역시 추석은 추석인가 싶었다. 집집마다 놀러 온 손자손녀 덕분에 우리 동네 나이가 순간 어려졌다.

조르르 몰려가던 아이들은 우리 옆집, 광산 김씨의 재실인 술선재(述先齋)에 놀러 온 손님이었다. 우리 집과 옆집 사이의 장독대 틈새 길을 찾아 내더니, 이층 테라스 뒤로 이어지는 대숲 계단까지 찾아낸 모양이었다. 옹기종기 모여서 올라간 목적지는 마을 뒤로 넓게 펼쳐지는 야트막한 언덕, 서포(西浦) 김만중(金萬重)의 집안 묘역이었다.

사실 이 집에 살기로 한 결정적인 이유 중 하나도 서포 김만중의 문학비였다. 우리 한글에 큰 획을 그은 선생의 기운을 받아 왠지 글이 술술 써질 것 같은 집. 코로나19 이전에는 일 년에 두세 권은 쏟아내야 하는 마감 일정에 쫓기곤 했는데, 글이 막힐 때면 작업실 창에 서서 문학비를 바라보곤 했다. 정려각 아래에 묵묵히 앉아 있는 선생의 뒷모습을 보고 있으면, 나도 얼른 다시 책상에 앉아야겠다 생각이 들었고 괜스레 머리도 맑아졌다.

몇 년째 오가며 만나는 문학비에는 희빈 장씨 아들의 세자책봉을 반대하다가 유배된 남해에서 어머니를 그리며 쓴 시가 있다. 그의 아버지 김익겸은 강화산성에서 청나라 군과 끝까지 싸우다 화약더미에 불을 붙여 자폭한 병자호란의 영웅이었다. 스물세 살의 젊은 남편이 죽고서 김만중의 어머니는 강화도 피란민을 태운 배 위에서 홀로 그를 낳았다.

관직을 잃고 귀양살이 가는 아들에게 그 어머니는 “아무 쓸모없다고 하며 공부를 그만둬선 안 된다”고 일렀다고 한다. 예로부터 공부란 문학, 역사, 철학이었으니 요즘 시대에는 자주 폄하되는 인문학이다. 그런 어머니 덕에 유배지에서도 굴하지 않고 임금에게 바른 소리를 낼 수 있었는데, 인현왕후를 폐위한 숙종의 잘못을 통렬하게 풍자한 우리나라 최초의 가정소설 '사씨남정기'의 탄생이었다.

한글소설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린 고대소설 '구운몽'도 어머니 덕분이었다. 귀양 간 아들을 자나깨나 걱정하는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해 읽고 쓰기 쉬운 한글로 하룻밤에 완성했다는 일화로도 유명한 작품이다. 사대부 자녀가 한글소설을 지어서 어머니에게 바치는 효도가 유행이었다고도 하니, 조선후기 사대부에서는 부모 자식 간에 꽤나 낭만적인 선물이 오갔던 셈이다.

길었던 추석연휴도 끝나고 잠시 들떴던 동네는 다시 조용해졌다. 수많은 어머니들이, 또 그만큼 많은 아버지들이 오도카니 고향집에 남았다. “자식은 오면 반갑고 가면 더 반갑다”는 자조 섞인 농담으로 위안을 삼지만, 식구가 떠난 자리만큼 쓸쓸한 자리가 또 있을까. 그 적막할 만큼 조용한 자리에, 유배지에서 처음 맞은 어머니 생일날 서포가 쓴 시를 남겨 본다. “오늘 아침 어머니가 그립다는 말을 쓰려 하는데/ 글씨를 이루기도 전에 눈물 먼저 가리우네/ 몇 번이나 붓을 적시다 도로 던져 버렸다.”

조심스레 건넨 걱정에도 퉁명스레 입을 닫고 뒤도 안 돌아보며 가버린 듯해도, 세상 많은 자식들이 비슷한 마음일 게다. 그리워도 그립다고 제대로 말로 전하지 못하는 이들을 대신하는 한 구절, 그래서 세상에는 시인이 필요한가 보다.



전혜진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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