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대전화를 통해 들려오는 악마의 목소리. 보이스피싱 사기는 한 인간의 삶을 송두리째 앗아감은 물론 남은 가족들도 평생을 고통 속에 살게 한다. 우리는 이미 20대 취업준비생과 60대 가장 등 수많은 이들이 극단적 선택을 하는 안타까운 상황을 목도했다.
코로나19 시국 속, 서민경제를 위협하는 보이스피싱 범죄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추석 명절을 앞두고는 택배회사를 사칭한 보이스피싱까지 등장했다. 반송된 물건이 있다며 상담원 통화를 유도한 뒤 개인정보 등을 빼내는 수법이다. 상품 배송 확인과 해외배송에 따른 주소지 변경을 유도하는 사례도 급증했다.
지난 10년간 보이스피싱 사건의 피해액은 3조2,333억원으로 집계됐다. 전기통신금융사기 피해 방지 및 피해 환급에 관한 특별법과 보이스피싱 방지를 위해 금융감독원과 법무부, 경찰청 등 7개 기관이 참여한 협의체가 존재하지만 보이스피싱은 매년 줄어들지 않은 것으로 전해진다.
보이스피싱 사기는 피해자의 잘못이 아니다
피해자는 있지만 가해자는 흔적도 찾을 수 없는 보이스피싱 범죄. 영화 '보이스'는 교묘하고 악랄한 범죄조직의 내부를 깊숙이 들여다보며 경각심을 일깨운다. 단지 흥미로운 소재로 관객의 관심을 낚는 것이 아니라, 절실함과 분노와 책임감이 느껴진다. 감독과 배우들이 허투루 임하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결과물이다.
이 영화는 보이스피싱 조직의 덫에 걸려 모든 것을 잃게 된 서준(변요한)이 빼앗긴 돈을 되찾기 위해 중국에 있는 본거지에 잠입, 보이스피싱 설계자 곽 프로(김무열)를 만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국내 공포영화의 대가로 꼽히는 김선 김곡 형제 감독이 연출을 맡았다.
김선 감독은 "공공의 목적성이 있었다. 누구나 보이스피싱 타겟이 될 수 있는데, 가해자들을 잡는 것은 쉽지 않다. 영화상에서나마 가해자들을 쫓고 추격하는 쾌감을 그리면서 그 속에서 보이스피싱의 섬세함과 디테일함을 담아내고자 했다"고 밝혔다.
김곡 감독은 "보이스피싱은 실제로 전 조직으로 이뤄지는 범죄다. 가해자와 피해액은 천정부지로 늘어나고 있는데 가해자가 익명화 되다 보니까 결과적으로는 피해자 분들의 자책감이 너무 크다"며 "우리가 사회운동가는 아니지만 영화적으로나마 해부해서 '당할 수 밖에 없는 범죄'라는 것을 알려드리고 싶었다. 가능하다면 피해자 분들의 억울함을 달래보고 싶기도 했다"고 털어놨다.
"있는데 없다"...조직 실체 구현한 '보이스'
영화에서 곽 프로를 연기한 김무열은 조직원들에게 자료 조사의 중요성을 설명하며 "팩트 체크는 구라의 기본"이라 외친다. "상대의 희망과 공포를 노린다"는 친절한 설명도 곁들인다. 이들은 인정사정 없이 피해자들이 피땀 흘려 모은 돈을 갈취하고, 쌓이는 돈을 보며 쾌감을 느낀다. 그야말로 흡혈귀 같은 존재들이다.
보이스피싱 범죄를 두고 "아는데도 당한다"는 말이 나오는 것도 같은 이유다. 주로 피해자의 절박한 사정을 이용하는 사례가 많다. 급전이 필요하거나, 대출이 필요한 이들을 노린다. 가족이 납치됐다거나 사고를 당했다는 거짓말을 통해 절박한 상황을 만들어내는 경우도 종종 있다.
영화 '보이스'에서 서준이 일하는 건설 현장에는 보이스피싱 조직원이 침투해 통신을 차단한다. 이때 그의 아내 미연(원진아)에게 "서준이 친구 김현수 변호사"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한 통의 전화가 걸려온다. 미심쩍어하는 아내에게 이내 경찰서라며 다시 전화가 오고, 미연은 점점 혼란에 빠지게 된다. 모든 상황들이 남편의 사고를 사실로 믿게끔 순식간에 벌어진다. 당사자와 연락이 닿지 않으니 겁에 질린 아내는 우선 일을 해결하기 위해 7천만원이라는 거액을 송금하게 된다.
실제로 보이스피싱 사기수법은 날로 교묘해지고 있다. 최근엔 아파트 분양시장까지 진출했다. 부산경찰청 강력범죄수사대는 코로나19 확산으로 인한 비대면 거래를 악용해 부산지역 재개발 아파트 공급계약서(분양권) 등을 위조하고 매수 희망자의 돈 1억5천만원을 가로챈 일당 11명을 붙잡기도 했다. 영화에서는 취업준비생들의 희망과 절박함을 먹이 삼아 범죄를 저지르기도 한다.
김선 김곡 감독은 보이스피싱 사례들을 연구하는데 집중했다. 피해자들을 만났고 전문가들의 도움도 받았다. 김선 감독은 "서울지방경찰청 지능범죄수사대, 보안을 담당하는 화이트 해커, 금융감독원 보이스피싱 전담반도 찾아 조언을 듣고 영화에 녹여내려 했다. 물론 수법이 수백가지가 넘어 1시간30분짜리 영화에 모두 담아낼 수는 없었다. 방대한 정보를 최대한 압축하려 노력했다"고 설명했다.
취재를 하며 감독들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김곡 감독은 "이들은 생각보다 더 조직적이다. 무엇보다 본거지가 한국에 없다. 동남아, 중국으로 퍼져 나가 있다"면서 "초현대적이고 어떻게 보면 과학적인 범죄라 할 수 있다"고 혀를 내둘렀다.
변요한 vs 김무열, 들끓는 에너지의 향연
가끔 원톱주연물이 아닌데도 한 명의 배우가 하드캐리하며 극을 이끄는 작품들이 있다. 이런 경우 집중도가 저하되는 건 물론, 흥행 노선에서 이탈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반대로 배우들의 강렬한 에너지가 팽팽하게 맞서고 스크린 밖으로 전달될 때 관객의 짜릿함은 두 배가 된다. '보이스'의 김무열과 변요한이 그렇다.
이번 영화에서 변요한은 보이스피싱으로 모든 것을 잃고 복수에 나서는 피해자 한서준을 연기한다. 절박함은 기본, 범인의 목소리를 기억하고 쫓는 냉철함과 본거지에 직접 잠입하는 대담함까지 갖춘 인물이다. 러닝타임 내내 변요한은 뛰고 구르고 맞고 때리고 쫓기며 쉴 틈 없는 액션 연기를 펼친다.
상대 배우 김무열은 변요한에 대해 "액션 연기를 할 땐 온 몸을 불사지른다. 액션팀이 걱정할 정도였다"고 회상했고, 전재형 무술감독은 "'저걸 배우가 했다고?' 싶은 스턴트 액션도 변요한 본인이 직접 다 했다"며 놀라움을 표했다.
몸을 던져 연기한 변요한은 "배우라는 직업을 갖고 살면서 때론 '귀한 일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이 들 때가 있다. 이번 '보이스'가 그랬다. 우리가 전달하는 메시지를 통해 많은 분들이 피해를 당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절실함으로 연기했다"고 진심을 전했다.
역대급 빌런으로 돌아온 김무열은 진짜 곽 프로가 있다면 이런 모습일 것 같다는 완벽한 캐릭터 소화력을 보여준다. 곽 프로는 보이스피싱 본거지의 기획실 총책인 극악무도한 인물이다. 김무열은 외형부터 음성까지 철저히 캐릭터에 맞게 바꾸고 준비해 극의 몰입도를 끌어올렸다.
조직원들을 상대로 연설하는 모습은 '보이스'의 명장면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궤변을 정성껏 늘어놓는 모습이 관객의 분노를 자극한다. 복수를 꿈꾸는 서준을 향해 "남의 고통을 먹고 사는데, 기왕이면 맛있게 먹어야지. 즐겨. 복수는 오래 못 가"라고 말하는 곽 프로의 모습은 보이스피싱 조직이 반드시 사라져야 하는 사회악임을 역설한다.
어쩌면 오늘 당신에게도 '김현수'의 전화가 걸려올지 모른다. 영화 '보이스'가 피해자들을 줄이는데 조금은 기여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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