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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 끝 소나무에 걸린 호수... 구름을 두른 듯 아찔한 바위산

입력
2021.09.15 04:30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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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 완주 고산·동상면 운암산과 대아저수지

운암산 능선의 두 번째 '명품 소나무'. 고고한 자태 아래로 대아저수지와 호남평야로 이어지는 들판이 시원하게 내려다보인다.

운암산 능선의 두 번째 '명품 소나무'. 고고한 자태 아래로 대아저수지와 호남평야로 이어지는 들판이 시원하게 내려다보인다.


전북 완주는 들이 넓을 뿐만 아니라 산도 높은 곳이다. 호남평야와 맞닿은 삼례읍과 봉동읍에서 동쪽으로 이동하면 나지막하게 오르막을 타던 산줄기가 어느덧 600~700m 고봉으로 변한다. 크고 작은 골짜기를 흐르는 물줄기가 모여 만경강을 형성하고 드넓은 호남평야를 적시는 지세다. 그 초입에 고산면이 있다. 한때는 완주 산간지역인 동상·경천·운주·화산·비봉면 일대를 포괄하는 독립된 현이었고, 지금도 지역의 작은 중심이다. 완주군에서 유일하게 오일장이 열려 장날(4·9일)이면 인근 주민들로 북적거린다. 식당 카페 편의점 등도 아쉽지 않을 정도로 있으니 완주 산촌을 여행하는 외지인에게도 ‘관광 허브’나 마찬가지다.


상상 속 구름 모자 쓴 바위산… 운암산 등산

만경강 줄기를 낀 들판에 고만고만한 마을이 정겹게 자리 잡은 고산 읍내를 지나 조금만 올라가면 커다란 저수지가 나온다. 북부 호남평야에 농업용수를 대는 대아저수지다. 1923년에 처음 축조했고 1989년 보강했다.

댐으로 물을 가둔 곳을 대개 ‘호수’라 부르는데, 이곳은 ‘저수지’다. 못보다는 크고 호수라 하기에는 모자라는 규모다. 가장 넓은 지점의 폭이 700m가량이니 서울을 가로지르는 한강보다 좁다. 주변을 기암괴석의 높은 산줄기가 감싸고 있어 골짜기를 파고든 물줄기를 따라가면 이곳이 저수지인지 강인지 헷갈릴 수준이다. 인공으로 만들었지만 그만큼 자연스러움을 간직하고 있다는 의미다.

호반도로 드라이브도 좋지만 조금 욕심을 내면 대아저수지의 또 다른 매력을 발견할 수 있다. 댐 동쪽에 수직으로 우뚝 솟은 운암산이 있다. 해발 600m가 조금 넘는 바위산이다. 수치만 보면 별것 아니지만, 저수지가 해발 130m 언저리인 것을 감안하면 결코 만만한 높이가 아니다.

완주 대아저수지와 운암산. 산이 크지는 않지만 웅장하면서도 아기자기하다. 오른쪽 아래 운암상회가 등산로 하산 지점이다.

완주 대아저수지와 운암산. 산이 크지는 않지만 웅장하면서도 아기자기하다. 오른쪽 아래 운암상회가 등산로 하산 지점이다.


대아저수지 취수탑 뒤로 고산면의 마을 풍경이 보인다. 이곳부터 가파른 산길이 시작된다.

대아저수지 취수탑 뒤로 고산면의 마을 풍경이 보인다. 이곳부터 가파른 산길이 시작된다.


등산객은 대개 댐 근처 호수 조망대인 대아휴게소(대아정)에서 출발해 운암상회(식당)로 내려온다. 약 4km에 불과하지만 가파른 산길이어서 3시간 이상 잡아야 한다. 등산로 입구는 대아휴게소에서 도로 맞은편에 있다. 풀이 무성해 이정표가 아니면 입구를 찾기가 쉽지 않다.

일단 등산로에 들어서면 겉보기와 달리 길이 순하다. 돌부리가 다소 거칠긴 해도 비교적 완만해 산책하듯 걸을 수 있다. 조금 오르면 나뭇가지 사이로 고산면의 들판과 마을이 언뜻언뜻 스친다. 산중턱에 커다란 굴뚝처럼 자리 잡은 취수탑을 지나면 그제야 험한 바위산이 본색을 드러낸다. 가파른 절벽마다 안전 밧줄이 늘어뜨려져 있다. 다리뿐만 아니라 팔 힘까지 써야 오를 수 있는 구간이다. 이왕의 산행이니 조바심 내지 않고 여유를 갖는 게 속 편하다. 계산하고 걱정하고 투덜거릴 시간에 느리더라도 한 발짝씩 앞으로 내딛는 게 실속 있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능선에 닿고 전망이 넓어진다. 산이 가르쳐 주는 지혜다.

운암산은 가파른 바위산이다. 안전을 위해 등산로 곳곳에 밧줄이 매여 있다.

운암산은 가파른 바위산이다. 안전을 위해 등산로 곳곳에 밧줄이 매여 있다.


운암산의 첫 번째 '명품 소나무'. 낭떠러지에 매달린 소나무 좌측으로 저수지가 보이고 우측으로 익산으로 이어지는 호남평야가 눈에 들어온다.

운암산의 첫 번째 '명품 소나무'. 낭떠러지에 매달린 소나무 좌측으로 저수지가 보이고 우측으로 익산으로 이어지는 호남평야가 눈에 들어온다.

능선 중턱쯤 닿으면 댐을 중심으로 좌측으로 산 빛과 하늘빛 가득 담은 저수지가 내려다보이고, 우측으로는 익산으로 내달리는 호남평야가 아스라히 펼쳐진다. 그 중간에 낭떠러지로 몸을 늘어뜨린 소나무 한 그루가 매달려 있다. 거칠고 가파른 암반에 뿌리를 내리자니 키를 키우기보다 아래부터 가지를 뻗어 중심을 잡았다. 백척간두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린 형국이지만 어쩐지 안정감 있다. 자태가 고결하고도 기품이 있어 등산객들 사이에서는 ‘명품 소나무’로 불린다.

초보자라면 이곳에서 왔던 길로 내려가는 게 좋겠다. 가파른 산길은 이후에도 한참 동안 이어져 500m 이상 능선에 닿아야 짧은 평지 길이 나타난다. 전망은 점점 아찔해 길에서 한 발짝 내디디면 바로 저수지로 다이빙할 듯하다. 바위틈에 뿌리 내린 잉크색 달개비와 진보라 층꽃나무 아래로 맑은 물그릇이 걸린다. 야생화로 뒤덮인 백두산 천지가 아닐까 잠시 착각을 일으킨다.

운암산 등산로 주변 바위 절벽에 뿌리 내린 층꽃나무.

운암산 등산로 주변 바위 절벽에 뿌리 내린 층꽃나무.


운암산 등산로 주변 바위 절벽에 뿌리 내린 닭의장풀.

운암산 등산로 주변 바위 절벽에 뿌리 내린 닭의장풀.


운암산 정상 부근 두 번째 '명품 소나무' 아래로 대아저수지와 일대 산줄기가 시원하게 내려다보인다.

운암산 정상 부근 두 번째 '명품 소나무' 아래로 대아저수지와 일대 산줄기가 시원하게 내려다보인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절벽에 몸을 붙인 소나무가 수두룩한데, 능선 끝 부분에 이르면 또 하나의 ‘명품소나무’가 멋진 풍광을 연출한다. 아래 것과 수형은 비슷한데 체구는 조금 더 크다. 두 갈래로 뻗은 가지 사이로 하늘 담은 대아저수지 물이 시리도록 푸르고, 이따금씩 바람이 살랑거리면 반짝거리는 잔물결이 살아 움직이듯 수면 위를 헤엄친다. 수직으로 내려다보이는 도로와 가로수까지 자못 이국적이다. 소나무 아래로 걸리는 풍광마저 흠잡을 데 없는 명품이다.

이곳에서 조금 내려서면 정상으로 가는 길과 운암상회로 내려가는 갈림길이 나온다. 아쉽지만 체력을 감안해 바로 하산하는 길을 택했다. 거의 처음부터 끝까지 모래와 푸석한 돌멩이, 낙엽이 뒤섞인 내리막길이다. 지그재그라고 하지만 가파르기가 고층빌딩 계단보다 심하다. 무릎 관절 보호를 위해 지팡이가 필수다.

산 빛 담은 대아저수지에 햇살 받은 잔물결이 움직인다.

산 빛 담은 대아저수지에 햇살 받은 잔물결이 움직인다.


운암상회에 도착해 왔던 길을 올려다본다. 멀리서 본 것보다 훨씬 가파르고 웅장하고 아기자기하다. 이제 곧 일교차가 큰 계절로 접어든다. 운암산(雲巖山), 산허리에 아침 안개가 걸린 모습을 상상해보면 왜 구름 모자를 쓴 바위산이라 했는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출발 지점인 대아휴게소까지는 도로를 따라 약 1.3km 걸어야 한다. 일행이 2대의 차량을 이용한다면 한 대는 운암상회에 대놓는 것도 방법이다.

이성계 위한 산성이 BTS 성지로… 위봉산성과 위봉폭포

대아저수지 바로 위에 동상저수지가 있다. 작은 보로 분리돼 있으니 하나나 마찬가지다. 두 저수지를 연결하는 도로는 말끔하게 포장돼 운치 있는 드라이브를 만끽할 수 있다. 동상저수지에서 소양면으로 넘어가는 고갯마루에 요즘 완주에서 뜨는 ‘핫플레이스’ 위봉산성이 있다.

아치형 축대만 남은 서문 입구에 ‘완주 BTS 힐링 성지’라는 팻말이 세워졌다. 고개 아래 아원고택, 오성제저수지와 함께 방탄소년단이 화보를 찍은 곳이다. 서문은 도로 바로 옆이어서 등산을 할 필요가 없는 위치다. 전체 16km에 달하는 대규모의 산성이지만, 도로 양편으로만 온전하게 성벽이 남아 있으니 대개는 이곳에서 인증사진을 찍는 것으로 산행을 대신한다.

완주 소양면과 동상면 사이 고갯마루의 위봉산성. 도로 바로 옆이어서 접근이 편리하다.

완주 소양면과 동상면 사이 고갯마루의 위봉산성. 도로 바로 옆이어서 접근이 편리하다.


아치형 축대가 남은 위봉산성 서문 너머로 종남산의 능선이 보인다.

아치형 축대가 남은 위봉산성 서문 너머로 종남산의 능선이 보인다.


위봉산성은 조선 숙종 원년(1675)에 쌓았다. 유사시에 전주 경기전에 있는 태조의 어진(초상화)과 조상의 위패를 모실 피난처로 이용하기 위해 축성했다고 알려져 있다. 지역의 인문지리를 정리한 ‘완산지’에 따르면, 산성 안에 세운 행궁을 영정이안소(影幀移安所)라고 밝혀 이 산성의 목적을 분명히 하고 있다.

실제 동학농민혁명 때 이성계의 초상화와 위패를 성안으로 옮긴 적이 있다. 동학농민군이 전주에 입성했을 때 전라감사 김문현이 성을 버리고 경기전의 영정과 위패를 받들고 와서 승려에게 맡기고 공주로 도망친 일이 있었다. 성안의 위봉사는 행궁을 지키고 산성을 수비하는 역할을 맡았다. '봉황의 위엄'(威鳳)을 갖춘 사찰이니 이름값을 제대로 한 셈이다.

위봉산성 안에 있는 위봉사. 유사시 행궁을 지키는 수호 사찰이었다.

위봉산성 안에 있는 위봉사. 유사시 행궁을 지키는 수호 사찰이었다.


위봉사는 백제 무왕 때 창건했다고 하니 역사가 오래된 절이다. ‘추출산위봉사’라고 적힌 일주문과 사천왕문을 지나 경내로 들어서면 정면으로 보광명전(보물 제608호)이 보이고, 마당에 멋들어진 소나무 한 그루가 호위하고 있다. 지붕의 용마루와 뒤편의 부드러운 산 능선의 조화가 아늑하다. 단단한 축대에 올라앉은 전각을 보면 행궁을 지키는 사찰답게 흐트러지지 않은 견고함이 엿보인다.

위봉사에서 동상저수지 방면으로 조금 내려오면 위봉폭포가 있다. 도로 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골짜기로 내려가는 계단에 서면 2단으로 떨어져 내리는 물줄기가 멀리서도 웅장하다. 60m 높이의 폭포는 통상 2단이라 하지만 세분하면 3단이다. 세 번째 물줄기는 계단을 따라 한참 내려가야 볼 수 있다. 도로 바로 옆인데도 깊은 골짜기에 감춰진 모양새다. 수풀로 덮인 암벽에서 떨어지는 하얀 물줄기가 요란한 물소리와 함께 포말을 날린다.

위봉사 아래 위봉폭포. 도로 바로 옆이지만 깊은 산중에 들어 있는 느낌이다.

위봉사 아래 위봉폭포. 도로 바로 옆이지만 깊은 산중에 들어 있는 느낌이다.


위봉폭포는 엄밀히 보면 3단이다. 도로에서 가장 아래 물줄기까지 내려가는 탐방로가 나 있다.

위봉폭포는 엄밀히 보면 3단이다. 도로에서 가장 아래 물줄기까지 내려가는 탐방로가 나 있다.


완주 고산면의 고산자연휴양림. 인근 대아수목원과 함께 숲 산책을 즐길 수 있는 휴양시설이다.

완주 고산면의 고산자연휴양림. 인근 대아수목원과 함께 숲 산책을 즐길 수 있는 휴양시설이다.

문화재청은 지난 6월 위봉폭포 일원을 자연유산 명승으로 지정했다. 폭포를 중심으로 주변의 산세가 깊고 기암괴석과 식생이 잘 어우러져 사계절 경관이 수려하다는 점을 평가했다. 조선시대 8명창 중 한 명인 권삼득(1771~1841)이 득음한 장소라는 점도 이유로 꼽았다. 우렁찬 폭포소리에 피를 토하는 명창의 노랫가락이 섞여 있는 듯하다.

폭포에서 계곡을 따라 걷기길이 이어지는데, ‘고종시 마실길’이라는 팻말이 보인다. 동상면과 고산면은 씨가 없고 단맛이 강한 고종시 생산지다. 바람이 선선해지면 산자락과 들판 곳곳에서 곱게 물들어가는 감나무잎 단풍과 발갛게 익어가는 감을 볼 수 있다. 대아저수지 위에는 대아수목원, 아래쪽에는 고산자연휴양림이 있다. 조용하게 숲 산책과 소풍을 즐길 수 있는 산림 휴양 시설이다.

완주=글?사진 최흥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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