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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부자들의 방역

입력
2021.09.13 04:3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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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시대에 가장 슬픈 네 글자가 있다. '임대문의'. 버티다 버티다 장사를 접고 떠난 영세 자영업자들의 눈물이 흥건히 고인 말. 코로나 시대에도 아직은 안전할 자격을 가리키는 세 글자가 있다. '정규직'. 종일 손님이 없어 식재료 내다버리는 마음 같은 건 몰라도 되게 해주는 말. 지난 1년 9개월은 재난마저 불공정해진 시간이었다.

나는 소득 상위 10%에 드는 정규직이다. 고강도 거리두기에도 나의 밥벌이는 하루도 멈추지 않았다. '저녁 있는 삶'이 이따금 지루했을 뿐 '매출 없는 삶'의 비참을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기내식 먹고 싶다고 투덜거리면서 영업하고 싶다고 발 구르는 소리는 흘려 들었다. 도서 대출은 해도 마이너스 대출은 필요하지 않은 삶이었다.

방역은 '감염병의 발생이나 유행을 미리 막는 일'(표준국어대사전)이다. 정부는 사전적 의미의 방역에 열심이었다. '감염병이 양극화와 불평등을 부추겨 사회적 재난이 되는 것을 막는 일'인 방역의 최종 목적엔 둔감했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를 틀어막느라 생존권을 희생해야 하는 '사람들'을 자주 잊었다.

왜인가. 희생할 게 많지 않은 사람들이 방역 정책을 짰기 때문이다. 정치인, 고위 공무원, 교수, 의료인… 대체로 고소득 정규직들이다. 거리두기 때문에, 바쁜 업무 때문에 돈 쓸 시간이 없어서 아마도 통장 잔고가 늘었을 사람들. 문재인 대통령은 "코로나19 방역으로 인한 국민들의 희생에 가슴 아프다"고 수시로 말했지만, 희생의 전말은 잘 모르는 것처럼 보였다.

언론은 이번에도 한발 느렸다. 재난의 크기를 '오늘의 확진자 수'로 간편하게 가늠했다. 누군가 죽어나간다는 얘기가 들려오기 시작하고 나서야 현장에 눈을 돌렸다. "거리두기 내리면 방역은 어쩌고?" 기계적으로 비판하는 기사를 많이 봤다. 늘 하는 생각이지만, 세상의 비극이 독해지는 건 나를 비롯한 기자들이 게으르고 덜 배고파진 탓이 크다.

'성공'은 상대적인 말이다. 살충제의 성공은 벌레의 죽음이고, 집회 차단의 성공은 목소리의 소거다. K방역의 성공은 확진자 규모는 통제했으나 특정 계층·업종을 파탄 내고 있다. 성공적 방역의 기준을 다시, 공평하게 정해야 한다. "확진자를 1,689명에서 1,421명으로 줄이는 데 성공했다"는 문장은 소상공인 박00씨와 프리랜서 김XX씨가 강제로 떠안은 고통의 실상을 설명하지 못한다.

방역을 폄하할 뜻은 없다. 방역이 첨단의 과학인 덕분에 무수한 사람들이 건강과 목숨을 지켰다. 그러나 방역은 과학이기만 해서는 안 된다. 고도의 정치여야 하고, 정치는 무엇보다 공정해야 한다. 정치의 공정은 '희생을 공평하게 보상하는 것'과 '재난지원금 액수를 공평하게 나누는 것'을 혼동하지 않는 것이다. 취약한 사람부터 보호하는 것, 사회 전체의 억울함의 총량을 줄이는 것이다.

"올여름의 할 일은/ 모르는 사람의 그늘을 읽는 일"(김경인 시인 '여름의 할 일' 중). 지난여름 교보생명 광화문글판을 올려다 보며 나의 그늘 없는 상태에 감사하고 그늘에 갇힌 누군가의 마음을 헤아려 보곤 했다. 같은 시엔 "그늘은 둘이 울기 좋은 곳"이라는 구절도 있다. '둘이, 셋이, 열이 함께 울어 주는, 아무도 혼자 울게 하지 않는 방역'으로 K방역의 정의를 새로 써야 한다.


최문선 정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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