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리케인 아이다에 美 북동부 쑥대밭 돼
최소 43명 사망... 20만 가구 이상 정전도
"기후변화, 허리케인 더 위험하게 만들어"
서유럽, 미국 서부 이어 기후 악재 이어져
“전례없는 폭우는 기후 위기가 현실임을 다시 한번 상기시켰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대형 허리케인 아이다(Ida) 피해 대책 마련을 촉구하며 한 말이다. 환경 문제가 초래한 재앙은 ‘세계 경제의 수도’마저 삼켜 버렸다. 다섯 시간 동안 쏟아진 133년 만의 기록적 폭우로 미국 뉴욕이 마비됐고, 북동부 지역에서만 40명 이상이 생명을 잃었다. 기후 변화가 인류의 목숨을 위협하는 건 이제 이례적이지 않지만, 그간 ‘기후 대응’을 부르짖으며 전 세계에 큰소리를 치던 미국조차 손 한번 쓰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당한 것이다. 이상 기후에 따른 재난 앞에선 선진국도 ‘안전지대’가 아니라는 게 점점 더 명확해지고 있다.
늘어난 수증기가 폭우 불러와
2일(현지시간) 일간 뉴욕타임스(NYT) 등 미 언론들에 따르면, 허리케인 아이다가 동반한 기록적 폭우로 이날 하루에만 뉴욕 뉴저지 코네티컷 등 총 4개 주(州)에서 최소 43명이 숨졌다. CNN방송 등 일부 매체는 사망자 수를 46명으로 추산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뉴욕·뉴저지주의 비상사태 선포를 승인했다.
지난달 29일 남부 루이지애나주에 상륙한 아이다는 북동쪽으로 이동한 뒤, 이날 말 그대로 ‘역대급’ 비를 뿌렸다. 1869년 기상 관측 시작 이래 최대 강수량이다. 예컨대 뉴욕 맨해튼 센트럴파크에는 18.3㎝의 폭우가 쏟아졌다. 이날 뉴욕 일대에 쏟아진 비는 총 1,324억ℓ로, 올림픽 대회 규격 수영장 5만 곳을 채울 수 있는 양이라고 CNN은 전했다. “하늘이 열리고 나이아가라 폭포 수준의 물이 뉴욕 거리로 쏟아져 내렸다”(캐시 호컬 뉴욕주지사)는 한탄이 나왔을 정도다.
미 북동부는 원래 허리케인이 자주 지나가는 지역이긴 하다. 그러나 이 정도의 폭우는 기상당국조차 예상하지 못했다. 통상 해상에서 생성된 허리케인은 육지에 닿으면 약해지고, 다른 지역으로 이동할수록 계속 힘을 잃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다가 처음 발을 디딘 루이지애나와 미시시피 인근의 희생자는 한 자리 수인 데 반해, 상륙한 지 나흘이나 지난 허리케인을 맞은 북동부의 인명피해 규모는 오히려 4배 이상으로 커졌다. 폭풍의 위력이 날로 더해졌다는 의미다. CNN은 “뉴욕 공무원들은 완전히 허를 찔린 것처럼 보였다”며 “대략 얼마나 많은 비가 내릴지 알고 있었던 기상학자들마저 폭풍이 다가온 속도에 놀랐다”고 전했다.
전문가들은 예년과는 다른 이례적 폭우의 원인을 기후 위기에서 찾았다. 지구온난화 탓에 허리케인이 과거보다 습기를 더 많이 품은 채 미국 본토에 상륙했고, 육지 이동 과정에서도 대기 중 수증기와 만나 더 많은 비를 머금었다는 분석이다. 4년마다 발간되는 연방정부의 ‘국가기후평가’ 보고서도 최근 “미 전역에서 폭우가 잦아지고, 특히 북동부에서 가장 큰 증가세를 보였다”며 “세계적으로도 대기의 수증기량이 육지와 해양 모두에서 늘어났다”고 적시했다.
문제는 전례를 찾기 힘든 기후 재앙이 이제 시작일 뿐이라는 점이다. 과학자들은 이상 기후로 ‘제2, 제3의 아이다 사태’가 벌어질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CNN은 “기후 변화는 아이다 같은 허리케인을 더 위험하게 만든다”며 “이전보다 강우량이 더 많아졌고, 일단 상륙하면 느리게 이동하면서 더 큰 폭풍과 해일을 일으키고 있다”고 지적했다.
선진국도 기후 위기 예외 아니다
기후위기 앞에 ‘예외’란 없다는 사실도 또다시 확인됐다. 기후 재앙은 그간 개발도상국에 한정된 현상으로 여겨졌다. 이례적 가뭄과 홍수 등의 대규모 피해는 사회기반시설이 취약한 저개발국가에서 주로 발생했기 때문이다. 선진국은 이들을 돕거나, 환경에 악영향을 끼치는 나라를 지탄하는 ‘관찰자’에 불과했다. 프리데리케 오토 영국 옥스퍼드대 환경변화연구원장은 “선진국 주민에겐 ‘날씨 때문에 죽을 수도 있다’는 인식 자체가 없었다”고 꼬집은 바 있다. 그러나 7월 서유럽을 휩쓴 물 폭탄과 미국 서부 12개 주를 초토화시킨 초대형 산불 등 사상 최악의 기후 재난에 이어, 두 달도 안 된 시점에 또다시 선진국이 기후 재앙을 만난 셈이다.
기후변화 대처에 미흡한 미국의 민낯도 여실히 드러났다. 고속도로 곳곳이 빗물에 잠긴 것은 물론, 46곳 이상 지하철역이 침수되면서 발이 묶인 채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승객은 800명이 넘었다. 20만 가구 이상(100만 명 추정)이 정전을, 60만 명은 단수를 각각 겪기도 했다.
빈민층 피해는 더 컸다. 뉴욕 퀸스에서는 아파트 지하에까지 빗물이 차오르면서 두 살배기 아기부터 86세 할머니까지, 여러 명이 목숨을 잃었다. 뉴욕시 사망자 13명 중 11명이 반지하방 거주자인 것으로 전해졌다. NYT는 “미국이 극단적 기후에 전혀 준비가 돼 있지 않다는 냉혹한 현실을 보여 줬다”고 지적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도 “뉴욕 인프라가 기후변화에 얼마나 취약한지 드러났다”고 꼬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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