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한한 퀸 엘리자베스호 가 보니
지난달 31일 영국의 최신예 항공모함 퀸 엘리자베스호(6만5,000톤급)가 경북 포항 인근 동해상에 떴다. 항모를 호위할 함정 4척과 수직이착륙 전투기 F-35B 10여 대도 함께였다. 압권은 F-35B의 이륙 장면이었다. 전투기는 승조원이 출발 신호를 주기가 무섭게 굉음을 내며 5초 만에 사뿐히 하늘로 솟구쳤다.
F-35B는 적의 레이더망을 피하는 기능(스텔스)을 갖춘 ‘수직이착륙기’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륙할 때 단거리 활주를 하고 착륙만 수직으로 한다. 스키점프대 모양의 활주로 경사가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제임스 블랙모어 영국 해군 항모비행단장(대령)은 “퀸 엘리자베스호는 F-35B를 최대 36대 탑재하고, 하루에 72회나 비행할 수 있다”고 한껏 자부심을 드러냈다. 축구장 2개보다 큰 총 면적 1만6,000㎡의 퀸 엘리자베스호가 ‘바다 위 군사기지’의 위용을 뽐내는 순간이었다.
40여 개국 순방을 위해 올 5월 영국 포츠머스 해군기지에서 출격한 영국 항모전단(함정 9척)이 이날 한국을 찾은 건 동해에서 우리 해군과 합동 탐색ㆍ구조 훈련을 하기 위해서다. ‘연합 해상기회훈련’이란 이름이 붙었다. 영국 항모의 방한은 1992년 인빈시블호, 1997년 일러스트리어스호에 이어 세 번째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여파로 부산 입항과 시끌벅적한 환영 행사는 불발됐지만, 영국 측은 한국 언론을 초청해 항모 내부와 F-35B 시범 비행 장면을 공개했다.
궂은 날씨에도 영국이 항모를 속속들이 보여준 건 무려 31억 파운드(4조8,000억 원)를 투입해 2017년 취역시킨 첨단 군사장비를 자랑하기 위한 목적만은 아니다. 그보다는 3만 톤급 경항모 도입을 추진 중인 한국에 ‘방산 세일즈’를 하려는 의도가 더 커 보인다. 영국은 한국 해군에 항모 기술 및 노하우 수출을 위해 오래전부터 공을 들였다.
한국 역시 바라는 바다. 군 당국은 항모 설계와 건조는 자체 기술로 할 계획이지만, 수직이착륙기의 고열을 견디는 갑판 기술과 항모에 장착할 전투지휘체계 등은 미국보다 영국의 협조를 받는 게 유리하다고 보고 있다. 9만3,000톤급 니미츠호 등 대형 핵추진 항모를 주로 보유한 미국과 달리 영국은 중형급(4만~7만 톤급) 이하 디젤 기반의 항모를 운용한다. 핵추진 기반 함정 제작이 불가능한 한국에 벤치마킹 대상으로 안성맞춤인 셈이다. 실제 우리 해군도 퀸 엘리자베스호처럼 배를 조종하고 전투기를 지휘하는 아일랜드(함교)를 2개 배치해 개념도를 만들었고, 함재기로 F-35B 도입을 검토하고 있다.
문제는 경항모 사업의 미래가 불투명하다는 점이다. 지난해 배정된 경항모 예산 100억 원이 국회에서 전액 삭감될 만큼 사업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국방부가 2022년도 예산에 경항모 사업 착수 명목으로 72억 원을 편성했지만 “미사일의 비싼 표적이 될 뿐”이라는 반대론자들의 의구심을 해소하지 못하면 올해도 퇴짜를 맞을 수 있다. 블랙모어 단장도 이런 우려를 의식한 듯, “항모의 전술적 이점은 기동의 자유”라며 “항모는 24시간 600마일(평균 시속 40㎞)을 이동하기 때문에 (적이)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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