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란드 청년들의 고민은 기후 위기와 세계 평화입니다.”
북유럽의 아동 돌봄 서비스를 공부하려고 핀란드 교육청을 방문한 윤홍식 인하대 사회복지학과 교수와 일행은 현지 관계자의 대답에 말을 잇지 못했다. 2010년을 살아가는 청년들의 고민을 물었는데 그 답변이 취업이 아니었다. 주거도, 결혼도 아닌 세계 평화가 고민이라고? 이것마저 “큰 고민이 없는 것 같다”라던 관계자가 생각을 다듬어 뽑아낸 답변이었다.
윤 교수는 이달 내놓은 저서 ‘이상한 성공’에서 당시의 충격을 털어놓는다. 한국 청년들은 태어나면서부터 평생 경쟁한다. 좋은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서, 좋은 직장을 얻기 위해서, 생존을 위해 치열하게 경쟁한다. 세상 사람들 모두가 그렇게 사는 줄만 알았다. 그런데 한국 청년들과 함께 신자유주의 시대를 살고 있다고 믿었던 핀란드 청년들의 삶은 뭔가 달랐다. 한국은 세계에서 손꼽히는 부자 나라가 됐는데 어째서 국민은 불행하다고 아우성일까, 무엇이 문제일까? 이상한 성공에는 여기에 대한 답을 답았다.
한국은 부유한 나라가 맞지만
혹시 한국의 경제적 성공이 착시는 아닐까? 그래서 다들 살기 힘들지 않을까? 그러나 여러 지표들에 따르면 한국은 틀림없이 부유한 선진국 가운데 하나다. 한국의 연평균 성장률은 1961년부터 2000년까지 8%가 넘었다. 2017년에는 구매력 기준 한국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가 일본을 앞지르기도 했다. 올해 7월 유엔무역개발회의는 만장일치로 한국의 지위를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으로 변경했는데 이러한 사례는 처음이다.
불행하다는 한국인들 많아
그렇다면 한국인들은 사실 행복한 것 아닐까? 이번에도 지표는 불행하다는 한국인이 넘쳐난다고 증언한다. 당장 자살률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다. 2015년부터 2019년까지 발생한 자살자의 4분의 1 정도가 경제생활 문제로 극단적 선택에 이르렀다. 한국의 노인 빈곤율(43.3%)은 2018년 기준 OECD 평균(14.8%)의 3배에 달한다. 한국인 10명 가운데 6명이 만성적 울분 상태에 놓여있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이러한 현실을 윤 교수는 ‘이상한 성공’이라고 부른다. 기업은 성장하고 나라는 부유해지는데 국민은 점점 더 불행해진다. 대기업과 정규직으로 대표되는 양질의 일자리를 얻은 소수를 제외하면 나머지는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며 생존을 걱정한다. 정부와 언론과 학계는 오래 전부터 ‘양극화를 해결해야 한다’고 노래를 불렀으나 상황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이상한 성공은 왜 지속될까? 윤 교수는 또다시 질문을 던진다.
86세대가 부를 독식했기 때문은 아냐
일각에서는 1960년대에 태어나 1980년대에 좋은 대학을 다닌 세대가 나라의 부를 독식했다면서 86세대 책임론을 제기한다. 이들이 학벌을 바탕으로 부동산과 좋은 일자리를 틀어쥐었고 또 자식에게 물려줬기 때문에 현재의 청년이 가난하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윤 교수는 세대론은 선동적 주장이며 한국 사회의 계급 불평등을 숨길 뿐이라고 비판한다. 냉정하게 따지면 1960년대생 대다수는 4년제 대학에 진학하지도 못했다는 이야기다. 이들은 열악한 노동환경에서 일하며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왔다. 이들은 결코 온라인 일각의 비하처럼 ‘꿀 빤 세대’가 아니다.
한국 사회가 복지에 무관심하기 때문
그렇다면 이상한 성공은 왜 나타났을까? 윤 교수는 한국 사회가 불평등을 감소시키기 위해서 적극적인 노력을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경제가 성장한다고 해서 모든 나라에서 양극화가 한국처럼 극적으로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부자에게 세금을 더 많이 부과하고 그 돈으로 복지지출을 높이면 소수가 과실을 독차지하고 나머지는 굶주리는 상황이 벌어지지 않는다.
핀란드가 한국보다 소득불평등 심하지만
실제로 OECD 회원국의 지니계수를 분석한 결과도 이를 뒷받침한다. 한국은 36개국 가운데 33번째로 소득불평등 정도가 낮은 국가다. 복지국가로 유명한 핀란드나 스웨덴보다도 평등하다. 그러나 국민에게 세금을 부과하고 각종 복지급여를 지급한 이후의 소득불평등 정도를 따지면 한국은 36개국 가운데 네 번째로 소득불평등 정도가 높은 국가로 집계된다. 실제로 한국의 GDP 대비 사회지출 비중(12.2%)은 2019년 기준 OECD 최하위권(35위)을 기록했다.
복지급여 지급한 이후에는 한국이 더 불평등
반면 핀란드는 사회 지출 비중(29.1%)이 OECD에서 두 번째로 높은 국가다. 청년의 삶이 다를 수밖에 없다. 부모로부터 독립해 혼자 사는 학생은 매달 주거비의 80%를 정부로부터 지원받는다. 매달 한화 34만원 정도의 학업 수당도 받는다. 여기에 학비마저 무료이니 맘껏 학업에 전념할 수 있다. 이밖에 전반적으로 복지제도가 잘 갖춰져 있어서 졸업하자마자 취업해야 하는 부담이 상대적으로 덜하다. 핀란드 교육청 관계자가 답변을 찾기가 어려웠을 법하다.
한국인들이 복지에 무관심한 이유는
그러나 한국에서는 세금을 더 걷고, 복지를 강화해 복지국가를 건설하자는 주장은 좀처럼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한다. 익숙하지 않은 방식이기 때문이다. 윤 교수는 한국인들은 오랫동안 국가가 제공하는 복지 없이 높은 경제성장으로 일자리를 만들고, 이렇게 만들어진 일자리에서 저임금에 장시간 노동하는 방식으로 불평등과 빈곤을 낮춰왔다고 분석한다. 이 과정에서 증세에 대한 거부감도 형성됐다. ‘국가가 해주는 것이 없으니 돈도 걷지 마라, 남에게 손 벌리지 않고, 내 가족은 내가 책임진다, 그것이 남 부끄럽지 않은 일’이라는 사고방식이 자리잡은 사회다. 국가가 복지를 강화하는 과정에서 보육부터 성평등에 이르기까지 개인의 삶에 지나치게 개입한다는 반발도 나온다. 이제 고성장이 멈춘 시대, 저성장 시대가 왔지만 이제까지 달려왔던 방향을 바꾸기가 쉽지 않다.
성장 멈춘 시대… 복지국가만이 해답
그래도 다른 길은 없다. 복지국가 건설이 해답이다. 윤 교수는 그렇게 주장한다. 경제성장으로 파이를 키우는 것만으로도 불평등이 자연스럽게 완화되던 시대는 분명히 끝났다는 이야기다. 국민이 정부를 불신하고 증세에 동의하지 않는 상황에서 한국은 북유럽이 될 수 없다는 비관론이 쏟아지지만 윤 교수는 단 한번의 개혁으로 살 만한 세상은 만들어지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정부의 투명성을 높여서 신뢰를 얻고 정치인들이 국민을 설득해야 한다. 단번에 정상에 오르기를 바라기보다 지금 한발씩 나아간다면 결국에는 복지국가에 이를 것이라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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